주간동아 245

2000.08.03

“손주 봐줄 시간 없어요”

활기찬 노후 즐기는 사람들…인터넷, 스포츠댄스 등 늦깎이 학생들 “하루가 짧다”

  • 입력2005-08-08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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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봐줄 시간 없어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위치한 송파노인종합복지관. 걸어다니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지는 무더운 여름날 오후였지만, 이곳은 층마다 무리지어 바삐 오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바깥 못지않은 열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3층 장수홀에서는 스포츠댄스 강습이 한창이었고, 옆의 휴게실에서는 노인들이 익숙한 솜씨로 포켓볼을 치거나 탁구 시합을 벌이는 모습도 보였다. 4층 음악실에서는 피아노 소리와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그 옆의 영화감상실에서는 여름 공포영화 특선 ‘귀곡성’이 상영 중이었다.

    2년째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곳에 나온다는 박춘미 할머니(67). “자식들과 떨어져 혼자 살면서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이곳에 나오면서 몸도 마음도 청춘을 되찾았다.”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어 공원을 찾거나 경로당에 나가 장기나 화투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노인들의 일반적인 일상이지만, 이곳은 그런 선입견을 깨끗이 지워준다. 최근 시나 구청에서 운영하는 노인복지관이 늘면서 이들 공간이 건강한 ‘실버 문화’를 가꾸는 본보기로 호평받고 있는 것.

    이들 노인복지관은 노인층을 위한 갖가지 여가활동과 건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다양한 문화 시설과 최신 설비를 갖추고도 이용료가 월 1만원 정도로 저렴해 이곳을 찾는 노인 수가 갈수록 늘고 있다. 송파노인종합복지관의 경우 현재 1500명이 회원으로 등록돼 있고 하루 평균 400명이 찾고 있다.

    호텔 요리사로 근무하다 정년 퇴임하고 이곳에 등록해 영어와 일본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김유양 할머니(63). “전엔 백화점 문화센터에 다녔는데 비용이 저렴하고 부담이 없어 이곳으로 옮겼다. 1주일에 한 번씩 인근 노인정과 경로당을 찾아 봉사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복지관에서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된 박춘미 김유양 할머니는 모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다. 이들은 “젊을 때 못해본 것, 배우고 싶었던 것 다 해보느라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다. 각자 생활이 있으니까 자식들과 따로 사는 것이 훨씬 좋다. 손주들도 봐줄 시간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얘기해뒀다. 생활의 리듬이 깨지면 안 되니까…”라고 입을 모은다.

    각 구청에서 운영하는 노인 컴퓨터 교실과 ‘실버넷운동본부’가 전국 80개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인터넷 교육에도 노인들의 참가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손가락이 굳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컴퓨터 자판에 곧바로 익숙하지 못해 고생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의욕은 젊은 사람 못지않다. 그동안 정보화의 소외계층으로서 느꼈던 서러움을 털어내고 있는 것. 실버넷운동본부의 1기 인터넷 교육 수료자인 홍윤명 할아버지(83)는 “2주일 동안 32시간 교육을 받으면서 이제는 인터넷으로 신문도 보고 이메일도 보낼 수 있게 됐다”면서 “만지면 큰일날까봐 근처에도 못 가던 손주 컴퓨터를 당당하게 쓰고 있다. 손주가 ‘우리 할아버지도 네티즌’이라고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한다.

    요즘의 노인들은 나이 먹었다고 뒷짐만 지고 고독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쾌적하고 활기찬 노후’를 기대하고 스스로 그런 생활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물론 국가나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기존의 양로 시설은 저소득층 노인들을 보호하기에도 벅차 질적인 면에서 쾌적한 노년에 대한 기대를 채워주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충분한 경제력을 갖춘 채 독립된 삶을 즐기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

    서울의 대표적인 실버타운인 ‘시니어스 타워’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생활은 ‘고독하고 소외된 노년의 삶’과는 다르다. 숙식은 물론 의료와 문화활동까지 모두 사용자 부담으로 제공되는 이곳은 노인들을 위한 갖가지 편의시설과 세심한 배려로 말 그대로 ‘노인 천국’이다. 물론 이런 유료 복지시설의 입주비는 서민들에겐 부담이 큰 액수. 입주보증금이 평수에 따라 1억3600만~2억7200만원이나 된다. 여기에 1인당 33만원을 매달 생활비로 내야 한다. 하숙비 개념으로 환산해보면 독신으로 15평형에 15년간 거주할 경우 최소한 월 1백33만원짜리 하숙을 하는 셈.

    예약도 10세대 이상 밀려 있다. 시니어스 타워 홍보팀장 이승희씨는 “입주자들은 전직 변호사, 회계사, 교수 등 전문직 출신들이 많고 사업가도 다수다. 입주 노인 가운데 자녀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의 노인들은 스스로의 삶을 자식에게 의존하기보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보내기를 원한다. 전통적인 가치관 변화는 벌써 삶의 형태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미국에서 발간돼 베스트셀러로 각광받은 스테판 M. 폴란의 책 ‘다 쓰고 죽어라’는 ‘똑같은 일을 죽을 때까지 하지 말고 전환하라, 은퇴하지 말라, 돈은 다 쓰고 죽어라, 늙을수록 이성과 적극적으로 사귀라’고 권하고 있다. 전 세대의 부모들은 일찍 은퇴해 한가롭게 살고 자식들을 위해 재산을 남긴다는 원칙에 따라 살았지만, 이제는 영원히 살 것처럼 재산을 모으지 말고 가족을 돕거나 자신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일에 돈을 쓰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

    약간 다른 취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 손봉호 교수(사회교육과)에 의해 올해로 16년째 소리없이 확산되고 있는 이 운동은 모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보다는 사회로 환원하자는 뜻으로 시작됐다. 600명에 이르는 각계각층의 회원들은 서로 만나지도 않고 신원 공개도 하지 않으면서 운동의 참뜻을 조용히 실천하고 있다. 손교수는 “불로소득인 유산은 부끄러운 것이다. 사회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부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자녀의 인생 무임승차를 예방하고 좀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운동의 취지”라고 설명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회원들은 한결같이 재산을 사회에 돌렸다. 유모 박사는 부인에게 남긴 집 한 채를 제외한 전재산을 학교에 기증했고, 대전의 백모 사장은 부동산을 3등분해 교회와 고아원,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에 기부했다.

    오늘의 노인들은 퇴직금과 자식들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임종의 그날까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서대 노인복지학과 심재호 교수는 “이제 우리 노인들도 경륜과 지식을 살려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줘야 한다. 정부는 선진국의 노인정책을 벤치마킹해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복지시설을 늘려 여생을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데 힘써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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