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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그들만의 잔치는 끝내야 한다

그들만의 잔치는 끝내야 한다

그들만의 잔치는 끝내야 한다
가끔은 별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아득히 먼 곳에서 태초의 신비를 전송해주는 별빛에 눈을 맞추어 보라. 그러면 세상이 무너질세라 아옹다옹 붙들고 사는 것들이 대개는 얼마나 허망하고 보잘것없는 일인가를 절로 깨닫게 된다. 그러나 별이 빛나는 밤, 우리는 우리 삶의 소중함도 확인하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죽음의 미학을 통해 우리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이 생을 살아가리라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좌절감을 못 이겨 끝내 자살의 길로 달려가고 마는 어느 젊은 조각가의 삶을 그린 미국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이 인상적이다. ‘Whose life is it, anyway?’ 우리말로 옮기면, ‘도대체 이것이 누구의 인생이냐?’ 정도 될 것이다. 이 ‘도대체’라는 표현이 묘한 감동으로 와닿는다. 한 번밖에 없는 내 인생, 잘나도 내 인생, 못나도 내 인생, 내 뜻대로 펼치리라. 왜 내가 남의 눈치를 보며 움츠린 채 살아가야 하느냐. 당당하게 살리라. 이런 의미가 가슴을 찌른다.

테니스를 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나보다 실력이 센 사람이다 싶으면 평소 그런대로 들어가던 서비스가 엉망이 되고 만다. 스트로크도 안 된다. 한국 축구가 세계무대에 나가서 남미나 유럽의 강호들과 겨룰 때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곤 하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시합도 하기 전에 주눅이 드니 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운동뿐만이 아니다. 노래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다. 매사가 다 그렇다. 자신감이 없으면 그나마 있던 실력도 발휘할 수가 없다.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입시 공부를 하느라 청소년기를 다 소진하고 대학에 들어왔지만 신입생들의 얼굴은 밝지가 못하다. 십중팔구는 얼굴에 짙은 그늘이 깔려 있다. 허탈감, 상실감이 가득히 배어 나온다. 공부를 시켜보면 다들 잘한다. 가르치다 신이 나서 “정말 서울대학생 못지않아!”라고 격려해줄 때도 많다. 그러나 그뿐, 학생들은 좀처럼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스스로 한계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너머로는 시선조차 주려 하지 않는다.



10년 남짓 교수 생활을 하면서 그 자의식의 무게를 덜어주려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이 황당한 부조리의 콤플렉스로부터 우리 젊은이들을 벗어나게 해줄 것인가. 어떻게 해야 이들이 ‘1등 공화국’의 그늘을 벗어나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고려 신종 때 최충헌의 사노(私奴)였던 만적(萬積)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느냐”고 절규했다. 그렇다. 주연이 따로 있고 조연, 엑스트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다. 각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밤잠 안 자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것이 좋은 사회다.

그래서 드라마 ‘허준’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허준역을 맡았던 탤런트는 그동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주연을 빛내주는 역할을 운명인 양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런 그도 기회가 주어지자 그 누구보다도 잘해냈다. 한때 좌절감에 못 이겨 산사(山寺)에 칩거한 적도 있다는데, 이런 인생의 쓴맛이 오히려 허준 연기를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여러 명의 주인공이 새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왕건’ 보기도 즐겁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조만간 개각을 할 모양인데, 제발 제2, 제3의 ‘허준’과 ‘왕건’을 많이 발탁해주기 바란다. 알량한 간판일랑 이번 기회에 아예 던져 버리고 그 대신 묵묵히 자기 분야에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바란다. 그래야 절대다수의 민중이 희망을 얻게 된다. 자정이 넘은 시간, 학원과 독서실을 가득 메운 이 땅의 젊은이들이 용기를 얻게 된다. ‘그들만의 잔치’는 끝내야 한다.



주간동아 2000.07.13 242호 (p10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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