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2

2000.07.13

남북관계 훈풍 타고 “더 가까이”

호텔 이어 자동차 공장도 진출…집요한 관계개선 노력이 ‘동토의 빗장’ 푼 열쇠

  • 입력2005-07-12 13: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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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관계 훈풍 타고 “더 가까이”
    유물론(공산주의)과 서구의 유신론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한때 기독교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통일교와 북한의 ‘밀월’(蜜月)이 바로 그것이다(통일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약칭 가정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여기서는 보편화된 이름인 통일교로 부르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은 금강산 관광 때문에 현대그룹이 북한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으나, 통일교는 그 이상으로 북한과 가깝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이 큰 화제가 됐지만, 통일교의 문선명(文鮮明·80) 총재는 이미 1991년 11월에 평양을 방문해 북한 주석 김일성과 회담을 갖고 남북교류협력 합의서에 서명한 바 있다.

    통일교와 북한 간의 밀월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월3일 평안남도 남포시 항구동에서 열린 평화자동차총회사(사장 박상권·50) 종합공장 착공식이다. 이 착공식에는 김용순 아태평화위 위원장 등 북한의 실력자들이 다수 참석했다. 지난해 출범한 이 총회사는 통일교 산하 기업인 서울의 평화자동차사(사장 박상권)가 70%, 북한의 조선연봉총회사가 30% 지분을 갖는 합영회사다.

    김정일 환갑 맞춰 1호 완성차 생산

    평화자동차총회사는 공장 완료 후 이탈리아 피아트사 제품인 2500㏄급 대형차 ‘알파로미오’와 소형차 ‘시에나’를 조립생산할 계획이다. 평화자동차총회사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갑인 2002년 2월16일에 제1호 완성차를 내놓는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평화자동차총회사는 연간 1만대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2006년쯤에는 연간 10만대로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다. 이 시기부터는 평화자동차총회사의 고유 자동차, 즉 북한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알파로미오와 시에나가 출시되기 전까지는 일본을 비롯한 제3국에서 중고차를 들여와 수리한 다음 북한에 판매하는 사업을 한다(일본 자동차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따라서 북한의 교통 체계에 맞도록 운전석을 왼쪽으로 옮기는 것이 주 수리 대상이다). 북한에서 운행되는 차를 정비해주는 사업도 병행한다.



    지금까지 통일교는 통일교와 박경윤 금강산그룹 회장이 공동 주주로 참여한 금강산국제그룹을 통해 대북사업을 벌여왔다. 그러나 평화자동차총회사는 박경윤씨가 관계하지 않은 통일교 단독의 대북사업이다. 평화자동차총회사 출범을 계기로 통일교는 단독으로 북한 진출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평화자동차 출범은 북한과 이탈리아가 수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년 벽두인 지난 1월4일 람베르토 디니 이탈리아 외무장관은 로마에서 김형림 북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상주 대표와 수교 합의서를 교환함으로써 외교관계를 갖게 되었다.

    통일교와 북한의 접근은 이것만이 아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5월24일부터 5월30일 사이에는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통일교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해 인상적인 공연을 마치고 돌아갔다. 통일교측은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방한을 평화자동차총회사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북한측의 축하 행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통일교의 대북사업은 오랜 시간 일관성 있게 추진돼 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남북관계가 좋지 않았던 문민정부 시절 통일교는 평양시내 한복판에 있는 보통강호텔(특급)과 안산관호텔(1급) 운영에 착수했다. 보통강호텔은 김일성 주석이 아홉 번이나 현지 지도했다는 곳인데, 일본인 요리사가 일본에서 공수해온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덕분에 평양에 있는 외국 대사관들은 이 호텔을 연회장소로 자주 선택하고, 평양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도 이 호텔 객실을 장기 임차해 사무실로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통일교측은 “이러한 임대료만으로도 웬만한 경비는 다 회수된다”면서 2년 전부터 보통강호텔 운영이 흑자로 돌아섰다고 설명한다. 안산관호텔은 호텔로서보다는 식당으로 더 유명하다. 보통강호텔과 안산관호텔은 북한 화폐가 아닌 엔화와 달러화만 받고 있다. 두 호텔은 외화가 빈약한 평양을 무대로 ‘외화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선명 총재는 평북 정주 출신의 실향민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통일교는 정주에 30만평의 땅을 마련해 평화공원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또 금년 중 평양시내에 ‘초교파 종교회관’을 세워 교단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사람은 모두 이 회관에서 종교의식을 치르게 할 계획이다. 리틀엔젤스 북한 공연에 이어 올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문총재 차남과 영혼결혼한 문훈숙씨가 이끄는 유니버설 발레단의 북한 공연도 추진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통일교측의 집요한 노력은 통일교와 북한이 가까운 동지인 것으로 비치게 한다. 그러나 통일교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를 기본 성격으로 한다. 1968년은 6·25전쟁 이후 남북 대치가 가장 첨예했던 시절이다. 68년 벽두인 1월21일 북한의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고(1·21사태), 이틀 후인 1월23일에는 미 해군의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되었다. 그해 10월30일에는 북한의 ‘특수 8군단’(한국군 특전사와 흡사)이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으로 침투해 두 달여 동안 비정규전(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렇게 남북관계가 극단으로 치닫던 1968년 통일교는 ‘국제승공(勝共)연합’을 창설했다. 당시는 ‘공산주의에 반대한다’거나 ‘공산주의를 박멸한다’는 뜻으로 ‘반공’(反共) 또는 ‘멸공(滅共)’이란 단어가 널리 쓰일 때인데, 통일교는 공산주의를 이기자는 뜻으로 ‘승공’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통일교의 한 관계자는 “반공과 멸공은 무작정 공산주의를 적대시하는 것이라 철학적 배경이 약하다. 그러나 승공은 공산주의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극복하자는 주장인 만큼 훨씬 더 논리적이다”고 강조했다.

    통일교 산하 단체 중에는 ‘세계평화교수협의회’가 있다. 냉전 벽이 높던 1984년 세계평화교수협의회는 제네바에서 “공산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이듬해 11월 서울에 온 문총재는 “통일이 곧 온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1986년 대학가에서는 주사파 계열인 자민투와 민민투가 출범해서 혁명 이론을 가열차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때 통일교는 전국남북통일대학생통일운동총연(통학련)과 전국교수학생남북통일운동연합(교학통련)을 만들어 대학가가 주사파 일색으로 뒤덮이는 데 대해 저항했다.

    공산주의 대항 운동을 벌여오던 통일교는 1987년 5월15일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출범시키며, 승공에서 통일로 운동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때 통일교의 철학적 축이 된 것이 문총재의 ‘형제통일론’이다. 형제통일론은 ‘성서’ 창세기 편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 형제 이야기를 근거로 한 것이다. 창세기는 21년 동안 고향을 떠나 있던 동생 야곱이 그동안 번 것을 몽땅 형인 에서에게 주고 에서를 굴복시켜 우애를 회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총재는 남북 통일도 이처럼 북한을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가능하다며 형제통일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 무렵인 91년 4월 문선명 총재는 소련을 방문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회담을 가져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때 통일교가 두드린 대북 창구는 유일하게 북한과 외부 세계를 연결해주고 있던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이었다. 4·19의거 직후인 1961년 5월13일 북한의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는 대남 사업을 펼치기 위해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라는 산하기관을 만들었는데, 88년부터 북한을 드나든 박경윤씨가 이 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통일교는 박회장을 통해 전금진(가명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을 접하게 되었다.

    1994년 5월 북한의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는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창구로 ‘아태평화위’(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조평통이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따라 통일교의 대북사업 파트너도 아태평화위로 변경되었다. 금강산국제그룹은 통일교와 아태평화위를 연계한 그룹이 되었다. 현재 금강산국제그룹은 통일교와 아태평화위가 각 40%, 박경윤씨가 20%의 지분을 갖고 있다. 통일교로서는 ‘적과의 동침’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 직함은 박경윤씨와 통일교의 박보희씨가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금강산국제그룹이 대북사업에서 거둔 최대 성과는 94년 1월27일자로 김일성의 친필 서명까지 받아낸 ‘금강산 관광개발 타당성 조사’였다. 이 조사를 통해 금강산국제그룹은 북한 정무원으로부터 50년 동안 금강산 관광개발 예정지 안에 있는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냈다. 그런데 98년 현대그룹이 아태평화위 김용순 위원장으로부터 전격적으로 서명을 받아내 금강산 개발에 착수해버렸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서명한 사업은 ‘불가침’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금강산국제그룹의 주요 주주이기도 한 아태평화위가 별도 계약을 맺고 금강산 개발권을 현대그룹에 넘겨주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긴 데 대해 북한은 적절한 설명이 없었고 박경윤씨나 통일교측 또한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통일교측은 평화자동차 등 다른 대북사업을 위해 금강산 개발권 문제는 덮어놓고 있는 상태다.

    대북사업과 관련해 통일교가 국내 언론으로부터 크게 주목받았던 것은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후, 문총재의 지시를 받은 당시 박보희 세계일보 회장이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을 조문했을 때였다. 그 바람에 국내 보수 진영은 통일교와 박씨를 맹공격했고, 박씨는 1년여 동안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통일교측은 “박회장의 방북은 사전에 관계당국에 다 알리고 간 것이어서 1년 후 박회장이 서울에 왔을 때 관계당국에서 간단히 조사만 받고 끝났다”고 설명했다.

    통일교측의 대북사업은 매우 집요하다. 한 관계자는 “우리는 섭리적 측면에서 본 통일논리 때문에 대북사업을 펼친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른 종교는 내세를 지향하고 탈역사적인 데 반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의 구원을 주장한다. 공산주의는 역사를 지배와 피지배 계급 간의 갈등으로 보지만 우리는 선과 악의 갈등으로 본다. 북한을 변증법적 철학에 기초한 유물사관과 주체사관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선한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것이 역사 속에 구원을 실현하는 한 방법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대북사업을 통한 통일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통일교는 현 정부보다 더 뜨거운 햇볕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통일교는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다. 과연 그들은 공산주의 북한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바라는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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