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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정체성 위기

한나라당 갈 길을 잃었나

‘이념 스펙트럼’ 넓어 ‘색깔’ 놓고 잦은 충돌…이회창총재 지도력 또 ‘시험대’에

한나라당 갈 길을 잃었나

한나라당 갈 길을 잃었나
”우리 당이 참 폭이 넓다.”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는 지난 6월22일 원외지구당 연찬회(경기도 성남시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에서 한나라당의 복잡한 구성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했다. 그러나 좋은 말로 해서 ‘폭이 넓은’ 것이지 뒤집어 보면 ‘구성원간 의견 차가 너무 크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총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당내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당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지 하는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 특히 최근 남북관계가 급진전되면서 당내 이견들이 돌출하며 서로 충돌하자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6월23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 최대 쟁점은 헌법 3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의 개정 문제였다. 전날 목요상 정책위의장이 휴전선 이북의 영토를 우리 영토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도화선이 됐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김용갑의원이 나서서 “민주당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 당이 너무 앞서나가는 것 아니냐”며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자 386세대로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영춘의원이 “헌법 3조를 ‘통일 때까지 대한민국의 영토를 휴전선 이남으로 한다’고 개정하면 우리 당이 변화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헌법 3조 개정을 둘러싼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 사이의 첨예한 시각차가 김용갑-김영춘의원에 의해 대변된 것.

결국 이 논쟁은 이총재가 직접 나서 “아직은 그 문제를 전면적으로 논의할 시점이 아니다”고 정리함으로써 일단락됐지만,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나라당에 나타나는 이념적 ‘헷갈림’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준다.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총재부터 헷갈리고 있는 것 같다”는 지적도 많다. 이총재는 6월17일 김대중대통령과 단독 조찬회동을 마친 뒤 “8·15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상당히 애쓰셨다”며 “야당도 남북 정상이 대화를 가진 것을 지지하고 그 결과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19일 기자회견에서는 “정상회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일대 혼란이 오고 가치의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비판론으로 돌아섰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실제 내용이 어땠는지 몰라도 어쨌든 이총재가 태도를 바꾼 것으로 비쳐 ‘이총재의 진짜 입장이 뭐냐’는 소리를 들을 만한 빌미를 줬다”고 말했다. 김원웅의원이 이총재의 19일 기자회견 직후 “남북정상회담을 냉전논리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자기 이해에 매몰된 편협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총재의 정체성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로 해석됐다. 이총재가 기자회견에서 보수 쪽으로 급선회한 것은 정형근 제1정조위원장 등 이총재를 둘러싼 당내 강경파 보수세력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까닭이라는 해석이다.

현재 한나라당은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볼 때 대략 보수, 중도, 신진 개혁세력 등 세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보수세력은 5, 6공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정치에 입문한 민정계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남북관계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세기 전의원, 이총재의 최측근 인사로 꼽히는 양정규 부총재, 김기배 사무총장과 정창화 원내총무 등 주요 당직자들이 대표적인 인사들이다. 김영삼 정권 때 국회에 들어온 정형근의원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 이총재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정의원과 이세기 위원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병렬 조웅규의원 등도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백진현 서울대 교수가 오래 전부터 이총재에게 자문해 왔다.

바로 이같은 이유로 인해 “이총재가 너무 과거인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총재의 한 측근은 “현재 한나라당에 있는 민정계 인사들을 극우 보수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5, 6공의 주도 세력은 우리 당에 없다. 우리 당에 있는 민정계 인사들은 5, 6공 당시 전문분야 종사자로 주도 세력 주변에 있던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중도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따라가기는 하는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다. 현재 한나라당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이들 중도파 의원이다. 정치적으로 각개 약진을 하고 있는 박관용-강삼재-서청원의원 등 범민주계 의원들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개혁세력은 386세대 의원들과 민주화 운동 등을 통해 나름의 개혁적 흐름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다. 이부영-김덕룡의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그룹과 김영춘-원희룡의원 등 초선의원 13명이 소속된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약칭 미래연대) 등을 들 수 있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해 한 가지 독특한 분석을 내놓는다. “개혁세력은 국내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고 개혁적이지만 국제문제나 통일-안보문제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 남북문제는 외교-안보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개혁세력이 목소리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 측근은 “반면 민정계는 외교-안보 부문에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어 개혁세력들보다 우위에 서있다”고 진단했다. 이총재가 현 정세 속에서 민정계 인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었다.

이런 한계 때문인지 이총재의 최근 행보는 보수 색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이총재는 6월23일 경기 김포의 해병부대를 찾은 것을 시작으로 24일 납북자 가족과의 만남, 25일 전몰군경미망인회 관계자들과의 오찬 등 보수층을 겨냥한 잇단 행사를 가졌다. “6·25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는 ‘오래된’ 구호도 외쳤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갈피를 못잡고 있는 자민련 지지세력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끌어오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 같다.

물론 보수와 혁신이라는 관점으로 정체성 문제를 보는 것이 꼭 옳은 것이냐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 보수와 혁신을 정체성의 잣대로 삼으면 여야 모두 정체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한나라당 한 초선의원은 “보수와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재 우리 당이 혼란스럽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야가 뚜렷한 정책 차이가 없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 그렇게 구분해서는 안된다. 굳이 구분한다면 우리는 온건한 보수세력이라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총재의 핵심 측근인 윤여준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당이 통일을 반대한다든지 정상회담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곧 통일이 될 듯이 열병걸린 것처럼 해서는 통일에 도움이 안된다. 개방적이면서도 신중한 접근을 해야 한다. 또 자신이 보수파라고 해서 통일 자체를 경직된 시각으로 봐서는 안된다. 이총재가 6월말 연찬회를 열어 난상토론을 갖겠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생산적인 진통과 갈등이 있을 것이다. 이제서야 당이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당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이런 과정을 통해 용광로에 용해돼 새롭게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정체성 위기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결국 2002년 대통령선거의 위기감이다. 남북문제의 폭발력을 감안할 때 여권이 대선과 연계할 수 있는 여러 카드를 쥐고 있는 상황이고, 야당은 자칫하다가는 그냥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수세적 입장이 대선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이총재를 비롯한 주류세력을 억누르고 있는 것. 이총재가 북한 언론인 초청이나 자신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 등을 언급한 것도 바로 이런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다. 또한 당내 이념적 차이를 잘 조정하지 못할 경우 정계재편의 빌미를 스스로 제공할 수 있다는 점도 위기를 느끼는 한 대목이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계속 냉전시대적 인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판단할 경우 도강(渡江)할 의원들도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위기론 속에서도 이총재 캠프는 “기본적인 입장을 견지해 가면 상황은 우리 쪽에 유리하게 돌아온다”는 낙관론을 견지하고 있다. △4·13 총선을 통해 형성된 구도와 사안의 맥락을 볼 때 여권이 통일론 하나만을 갖고 정국을 끌어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기에 여권이 마음대로 판을 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등이 그렇게 보는 이유. 남북문제는 결국 돈 문제(통일 비용)인데 현 정부가 그런 돈을 조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할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어찌 되었든 최근의 정국 상황은 이회창총재의 지도력을 재차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이번 시험은 ‘네거티브 전략’의 반사적 이익이 통하지 않고, 생산적인 비전과 통합적인 리더십, 긍정적인 통일관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층 엄격한 관문이 될 듯하다.



주간동아 2000.07.06 241호 (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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