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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가로등, 1분간의 의식

가로등, 1분간의 의식

가로등, 1분간의 의식
창밖을 본다. 짙은 어둠이 도시 위에 깔려 있다. 모든 사물들이 마비된 것 같다. 바로 이때, 여기저기서 연주홍색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너무 작아서 반딧불 같기도 하다. 그것들이 점점 커지면서 형체를 드러낸다. 바로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이다. 완전히 켜질 때까지 1분 정도 걸린다. 나는 이 현상을 ‘1분간의 의식’이라 부른다.

한강변에 살고 있어 저녁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로 달려간다. 환상적이고 엄숙하기까지 하다. 1분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밝고 활기에 넘친다. 즐거움과 부드러움이 흐른다. 그리고 편안하다.

가로등은 일시에 세상을 어둠에서 빛으로, 딱딱함에서 부드러움으로, 불안함에서 편안함으로 바꾸어 준다. 그래서 나는 많은 불빛 중에서 가로등 빛을 가장 좋아한다. 어렸을 적 고향집 동네의 창호지 문을 통해 비치던 그 아련하고 포근한 등잔불빛이 생각난다. 가로등이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은 순수함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기적이 아닌 순수함이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뜨거운 태양이 작렬해도, 가로등은 변함없다.

세상에는 가로등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환경문제가 생겼다 하면 달려가는 그린피스와 동물 보호가들, 지뢰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가 하면 기아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구하자고 호소하는 사람들…. 가깝게는 참교육 실천, 경제 정의 실천, 소비자 보호, 성폭력 방지, 그리고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운동을 펼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홀로 묵묵히 가로등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을 것이다. 이웃들의 상처와 고통을 감싸주는 사람들,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하는 가장들, 가족을 위해 힘든 연출가가 되어야 하는 주부들도 이에 속할 것이다.

파리 여행중의 일이다. 새벽에 빵을 사러 나갔으나 빵집을 찾을 수 없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당신의 미소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고 기분 좋은 말까지 덧붙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 눈인사라도 나누면 그 답답한 공간이 얼마나 환해질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가로등을 보며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빛이 강하면 어둠은 약해지는 법. 날로 우리의 삶이 물질에 얽매이고 불안과 소외감에 시달릴수록 밝은 빛은 더욱 필요할 것이다. 나는 우선 내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작고 쉬운 것부터 찾아보리라. 깡마른 키다리 아저씨가 저녁마다 1분간의 의식을 치르듯이, 나도 주위를 밝히고 책임을 다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주간동아 2000.04.27 231호 (p9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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