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1

2000.04.27

감정 샅바싸움 땐 ‘판’ 깨질라

양측 넘어야 할 걸림돌 많아… 전쟁 책임·김일성 시신 참배 등 지뢰밭 슬기롭게 피해야

  • 입력2006-05-19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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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샅바싸움 땐 ‘판’ 깨질라
    남북정상회담이 결정됐다고 보도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지난 50여년간 꼬여온 남북문제 중 상당부분이 풀린 것처럼 반가워했다. 서로 말조차 건네지 않던 양쪽이 대화를 하겠다고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 아니냐는 찬사였다. 그러나 마주앉는다고 해서 문제가 풀렸다고 속단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낼 때는 그래도 싸우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화를 위해 마주앉게 되면, 그동안 쌓였던 온갖 감정이 터져나와 오히려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은 통일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향한 ‘길고 긴 고난의 시작’일 뿐이다. 이 ‘고난의 장정’ 앞에는 숱한 ‘지뢰’가 깔려 있다. 그중 한 개라도 밟아 터뜨리면 통일의 꿈은 허무하게 깨지고 만다.

    남북회담을 중단시킬 수 있는 지뢰의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가 한국측에서 “왜 북한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한국전쟁을 일으킨 데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한다면 그날로 회담은 결렬이다. 반대로 북한측에서 “통일은 자주적으로 해야 한다. 주한미군을 철수시켜라”고 한다면, 우리 또한 회담장을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다.

    북한측이 “북한을 방문한 외국 원수들은 전부 혁명열사릉과 금수산 의사당에 안치된 김일성 시신을 참배했다”며 “김대중대통령도 이곳과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를 방문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곤란해진다. 반대로 우리측이 “그렇다면 김정일국방위원장도 반드시 서울에 와 한국전쟁 때 희생된 장병들의 영혼이 안치된 국립묘지를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북한측도 난처해질 것이다.

    남북 대표들의 정상회담을 결렬시킬 수 있는 함정은 셀 수 없이 많다. 양측은 이러한 지뢰를 슬기롭게 피해나가야 한다. 회담 결렬을 초래할 예민한 문제, 예를 들어 태극기와 인공기 게양-국가(國歌) 연주 같은 골치 아픈 문제는 무조건 생략하는 것이 남북정상회담을 제대로 끌어가는 첫 번째 방법이다.



    보통의 정상회담이라면 양국 외교부가 사전에 만나 의제를 정하게 된다. 이렇게 실무진이 회담 가이드 라인을 정해 놓는 것을 ‘포지티브’(positive) 방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 회담에서는 포지티브 방식을 택하면 안된다. 이 회담만은 “이러이러한 주제만은 논의하지 말자”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을 택해야 한다. 전쟁 발발 사과나 주한미군 철수 같은 네거티브한 주제는 아예 배제하고, 나머지는 두 정상이 알아서 자유롭게 논의하게끔 해야 한다. 네거티브 방식을 유지하는 것은 이번 회담을 통일 회담으로 끌고 나가는 두 번째 방식이 된다.

    세 번째로 우리 대표단이 고민할 것은 김대중대통령의 체력 문제다. 94년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했을 때의 기본 구도는 ‘팔팔한’ 김영삼대통령과 ‘노쇠한’ 김일성주석 사이의 이벤트였다. 당시 김대통령은 67세로 매일같이 조깅을 해 건강이 아주 좋았다. 반면 김일성은 15세나 많은 82세였고 죽기 한 달 전이었다. 두 정상이 의제부터 정해야 하는 회담인 만큼 남북정상회담은 철저한 체력전이 된다. 체력이 강한 쪽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다.

    94년의 경우 북한 실무 대표단은 이러한 점을 고려한 듯 남북 정상이 마주하는 회담 시간을 제한하자고 제의했다. 큰 회담을 앞두고 사소한 문제로 다투는 것은 바보짓이다. 우리측 역시 북한의 사정을 간파한 터라 이 요구를 받아 들였다. 그 대신 회담 횟수에는 제한을 두지 말자고 역제의해 관철시켰다. 체력전을 피하자는 북한측과 체력전을 통해 상대를 앞도해 보자는 우리측의 복안이 이러한 ‘황금률’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 구도는 완전 반대다. 김대중대통령은 75세로 비교적 나이가 많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보다 18세 젊은 57세다. 더구나 김정일은 밤에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회담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초롱초롱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 실무진은 김대통령이 피곤해지지 않도록 적절한 시간대를 고르고, 회담 시간과 횟수에 제한을 두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반대로 북한이 이러한 약점을 잡아 “양 정상간의 회담은 무주제로 시간 제한 없이 하자”고 제의해도 곤란하다. 북한측이 이러한 제안을 고집하면, 우리는 남북정상회담 자체를 무산시키는 쪽으로 몰리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남북정상회담은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이므로 양측 모두가 상대 사정을 배려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북한은 주민 여론과 언론이 당국의 통제를 받지만 한국은 국민 여론과 언론 논조가 자유롭게 형성된다. 이에 따라 한국민의 여론이 의외로 남북정상회담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수 언론이 “우리측이 너무 많이 양보했다”고 여론몰이를 하고, 이에 편승한 국회가 “남북정상회담에서의 이면 합의가 무엇이냐”고 따지게 되면 회담은 곧바로 위기에 봉착한다. 따라서 남북 실무진들은 한국 언론에 대해 밝힐 것은 밝히고 협조를 구할 것은 구해, 오도된 여론이 형성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94년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이 정상회담을 열기로 했을 때 윤여준안기부장 제3특보(현 한나라당 전국구 의원 당선자)는 ‘국무총리 특보’란 타이틀을 달고 실무회담에 참여했다. 이때 그의 파트너가 현재 북한 외상인 백남순이었다. 백남순과의 실무회담과 별도로 그는 정상회담 사전 준비를 위한 선발대를 이끌고 평양을 다녀오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선발대는 김영삼대통령을 포함한 정상회담 본대(本隊)가 평양에 갔을 때 겪게 되는 모든 일을 사전 조율하는 일을 한다. 본대가 평양에 머물 때는 본대와 평양 측을 연결시키는 창구역할도 한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선발대 대표를 맡은 것은 일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윤특보는 선발대 대표로 지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중압감 때문에 식욕도 잃어버렸다. 역사적인 일을 맡았다는 기쁨보다는 그 일이 주는 스트레스가 훨씬 더 컸던 것이다. 그러다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휴우!-”하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잠을 자고 밥을 제대로 먹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한다. 이와 똑같은 중압감을 이번 회담에 참여하는 남북 대표들은 겪게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은 양 정상과 양쪽의 실무진, 그리고 한국 언론이 서로의 발을 묶고 함께 뛰는 ‘5인6각’ 게임이다. 이중 한 명만 엎어져도 전체가 무너진다. 곳곳에 지뢰와 폭탄이 산재해 있는데 남북한은 5인6각 달리기를 과연 완주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완주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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