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6

2000.01.06

굶주림의 땅, 총살에 화형까지

탈북자 증언 보고서… 남한사람 만나거나 경미한 절도도 ‘예외없이 총살’

  • 입력2006-05-25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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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계는 너무 모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과 기근으 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오는 주민들이 많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 그러나 북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 이외에 맞아죽거나 총살당해 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 또 화형(火刑)이라는 잔인무도한 방법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먹혀서 죽는 사람들도 있다. 이 글은 11월 중순경 중국 동북 지방의 한 도시에서 만난 탈북자 20여명의 증언을 토대로 관계기관이 작성한 것이다. 이들 탈북자는 대개 99년 10월 말경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 지금 북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이 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아본다. 》
    굶주림의 땅, 총살에 화형까지
    공개 총살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함북 무산이 고향인 이영훈군(17)에 따르면 무산에서는 주로 무산 중학교 옆 청년 공원에서 총살이 이루어진다. 총살이 집행될 때는 우선 사람 키보다 큰 나무를 땅에 박고 그 나무 앞에 작은 발판을 놓은 뒤 발판 위에 사람을 세운다. 사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가 사형장에나올 때부터 이미 초죽음이 되어 질질 끌려 나온다. 감옥 안에서 갖은 혹사와 구타를 당한 것이다.

    총살할 때는 세 사람의 군인이 한 사람을 동시에 쏜다. 자동 소총으로 군인 한 사람당 네 발을 쏜다. 사형수는 모두 12발을 맞는 것이다. 옆에 있는 방송차에서 “앞에 있는 범죄자를 향하여 단발로 쏴”하는 명령이 떨어지면 총을 맞은 사람의 머리가 먼저 푹 떨어지고 피가 솟구쳐 나온다. 그 다음 몸통이 터진다. 보통 몸통의 피가 밖으로 튀지 않게 두꺼운 베옷을 입히지만 그래도 피가 배어나와 밖으로 흐른다. 총 12발을 맞은 사람은 몸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마대에 감아 번호판이 없는 차에 실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차에 번호판을 붙이면 사형당한 사람들의 가족이 그 번호를 보고 그 차에 대한 보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번호판을 뗀다. 시체를 어디에 버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은 시체를 매장할 방법이 없다.

    총을 쏠 때는 예외없이 먼저 머리부터 쏜다. 왜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총살을 하는 것일까? 청진이 고향이고 해군에서 7년 동안 복무하다 탈출한 김용진씨(25)에 따르면 머리 속에 자본주의 사상이 들어갔기 때문에 총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북한 인민들에게 명백히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탈북자 등이 많지 않았던 90년대 초반까지는 공개 총살형이 있더라도 몸통부터 쏘았다는 것이다.

    공개 총살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보통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게 된다. 가족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가족은 그 총살이 정당한 것임을 구경나온 사람들에게 충분히 증언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족이 무사한 것은 아니다. 북한 당국은 가족들의 보복이 두려워 그들 모두를 보위부 감옥으로 보낸다.

    공개 총살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함북 회령이 고향이고 군에서 3년간 복무하다가 탈북한 김성철씨(23)는 회령에서만 스무번 넘게 공개 총살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머리가 박살나 피가 사방으로 솟구치고 온 몸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지듯 나오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너무나 끔찍하여 진절머리가 나고 밤마다 공포감에 시달렸습니다. 잠도 잘 오지 않고 잠이 들었다 해도 끔찍한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총살 장면도 자꾸 보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공개 총살의 경우 연좌제가 적용돼 일가족 3대가 동시에 사형대 앞에 서는 경우가 있다. 무산에서 온 이성수군(16)의 증언에 따르면 1998년 1월8일 무산 사람 김성도(21)가 한국의 안기부에 의해 매수당했다고 하여 김성도 본인과 아버지, 어머니, 친척 한 사람 등 모두 4명이 동시에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처럼 북한에서는 과거 조선시대 역적을 처벌할 때 3대를 모조리 멸하는 것과 같은 전근대적인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김성도는 무산에서 김정일을 반대하고 친한국 바람을 일으키려 하였고, 나아가 청진 사람들까지 포섭하려다가 북한 안전부에 신고되는 바람에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의 판단에 따라 죄질이 심한 사상범인 경우는 가족을 함께 총살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가족을 보위부 감옥으로 보낸다. 북한의 감옥은 말이 감옥이지 죽음의 수용소나 다름없다. 가족들은 감옥 안에서 굶주리고 매맞아 결국은 죽게 된다. 비록 총살은 당하지 않지만 죽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탈북자들은 93년경 이인모 노인이 북한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남한 감옥에서 30년 이상 갇혀 있었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데 대해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의 상식으로는 감옥에서는 5년 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은 건강한 이인모 노인을 보고 남한은 감옥조차도 저토록 살기 좋다면 감옥 바깥의 사회는 얼마나 살기 좋겠는가 생각했다고 한다.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북한의 범죄 기준으로 볼 때도 무고한 사람들이 많다.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은 산에 조그만 구멍을 파고 웅크린 상태에서 파묻힌다. 어디에 파묻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은 시신을 볼 수도 없고 다시 매장할 수도 없다. 최기태씨(25)에 따르면 보위부 감옥은 종성군 동포에도 있고 회령시 창효리에도 있다고 한다.

    소 잡아먹거나 기계 부품 빼내도 총살감

    회령에서 군생활을 한 김성철씨는 96년 이후 회령에서만 20회 이상의 총살을 목격했다. 김용진씨(25)는 청진에서 7회의 공개 총살을 목격했고, 라남에서 3회의 총살을 목격했다. 최근에도 총살이 있지만 특히 96년에 가장 빈번했다고 한다. 이영훈군은 무산에서 95, 96, 97년에 10회 정도 공개 총살형을 목격했다. 최기태씨는 회령에서 13회의 총살을 목격하고 무산에서 여자가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성수군은 무산에서 세 번, 무산 밑의 고무산에서 한 번 총살을 목격했다. 이것을 종합하면 95년 이후 회령에서 20회 이상, 무산에서 10회 이상, 청진 부근에서 10회 이상의 공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간간이 화형도 있었다.

    한 번 총살이 집행될 때는 많으면 9명, 적으면 4명이 죽임을 당한다. 한번에 평균 5명 정도가 총살당한다고 하면 95년 이후 회령, 무산, 청진 일대에서만도 200명 이상이 공개 총살(화형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다.

    공개 총살은 최근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최기태씨의 증언에 따르면 99년 8월 회령에서는 6명이 동시에 총살당했다. 소 열일곱마리를 도둑질하여 잡아먹었다는 죄목이었다.

    총살은 엄중한 범죄에만 집행되는 것이 아니다. 절도와 같은 아주 경미한 사건도 총살감이다. 소를 잡아먹거나 공장의 구리를 빼내 팔아먹은 사람, 기중기 등의 부속품과 금속을 빼내 팔아먹은 사람도 모두 총살감이다.

    그 중에 총살감 1호는 중국에 건너가 기독교도나 한국 사람을 만난 경우다. 이럴 때는 사상이 완전히 변화하였다고 하여 갖은 고문을 당한 뒤 사형이 집행된다. 한국 사람을 만난 경우 그 직업이 무엇이든 사형이 집행될 때는 무조건 안기부 요원을 만난 것으로 발표된다고 한다.

    최기태씨의 또다른 충격적인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서 화형(火刑)이 집행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화형 이야기는 지금까지 한국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 한때 악마라고 여겨지던 사람들에게 집행된 화형이 한반도의 북쪽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99년 10월 중국으로 넘어온 군인 최기태씨는 96년 여름 함북 무산에서 화형이 집행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다. 화형은 무산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당시 화형에 처해진 사람은 23세의 여자였다. 자기 언니와 둘이서 나체 사진을 찍어 중국에 팔았다는 죄였다. 그녀의 언니는 중국 화룡에 기거하고 있는데 동생이 언니를 만나러 도강하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몸을 수색해 보니 그녀와 언니의 나체 사진이 발견된 것이다. 이 자매는 나체 사진을 찍어 밥벌이를 해온 것이다. 북한은 나체 사진에 대해 자본주의 황색바람이 들어온다고 하여 대단히 경계한다. 그 렇다고 해서 화형에까지 처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처사다.

    화형은 어떻게 하는가. 나체 사진을 찍은 여자가 먼저 나무에 매달린다. 그리고 밑에 장작을 모아놓고 불을 놓는다. 북한 안전부에서는 가족에게 화형 집행을 직접 시킨다. 이 여자의 경우에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무를 주워온 뒤 아버지에게 불을 붙이도록 했다. 화형을 시킨다는 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일인데 가족으로 하여금 불을 붙이도록 한다니 그 가족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그 여자는 몸이 불에 타들어가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도 언니는 중국에서 돈 많이 벌어 잘 살 것이다”고 절규했다고 한다.

    사람 고기로 음식 만든 여주인도 화형

    김용진씨도 청진 수남에서 목격한 화형을 증언했다.

    95년 8월 청진 수남에서 국밥집을 하는 한 여자가 아기 고기로 고기국밥을 만들어서 팔다가 발각됐다. 그 아기는 엄마가 외지에 식량을 구하러 나가면서 식당에 맡긴 애였다.

    일주일여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기 엄마는 자식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변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을 알았다.

    식당 주인은 수남다리 옆 공터에서 화형을 당했다. 무산에서 화형당한 여자처럼 그 여자의 가족이 직접 불을 놓았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수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95년이면 북한의 기아가 가장 심각한 해였다. 그동안 북한에서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설이 분분했는데 김기태씨의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단순한 설이 아니라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김씨 역시 그 국밥을 사람 고기인 줄 모르고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김기태씨에 따르면 그 국밥집은 독특한 맛 때문에 손님이 많았다고 한다.

    창자는 순대로, 고기는 국밥으로 “이럴 수가”

    김용진씨가 사람 고기 이야기를 꺼내자 최기태씨도 97년 4월에 회령시에서 사람 고기를 팔다가 발각돼 가족 모두가 총살당한 사건을 증언했다. 이 가족은 먹을 게 없어 가진 집까지 팔아먹고 급기야 아기들을 몰래 데려다 죽인 뒤 그 고기를 팔기 시작했다. 창자는 순대로 만들고 고기는 국밥을 만들어서 팔았다.

    이 가족이 아기 고기를 팔기 시작한 것은 95년 10월부터였다. 이들은 1년 이상 아기 고기를 팔아왔기 때문에 희생된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정확한 숫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기태씨는 그 집에서 발견된 50kg짜리 마대 4개에 100원짜리가 가득하고 이불장을 뒤지니까 사람 귀가 말라 비틀어져 수두룩하게 나왔다고 했다.18세 미만의 미성년자일 경우는 사형을 시키지 않는데 이 집의 아들과 딸은 그 죄질이 너무 중하다고 하여 모두 사형시켰다고 한다.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을 통해 확인한 공개총살, 화형, 인육 사건 등은 모두가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충격적인 이야기들이다. 히틀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염소가스로 유태인들을 집단 학살했고, 크메르루주는 사람 얼굴을 비닐 봉투로 싸고 독가스를 집어넣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 북한의 김정일은 사람들을 굶겨 죽이고 감옥에서 고문-구타해 죽이고, 공개 총살로 죽이고 급기야 불에 태워 죽이기까지 한다.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북한에서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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