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2

1999.12.09

영국 노인들 “나이? 묻지 마, 다쳐”

방송 ‘입김’ 영향력 막강, 정부도 눈치보기… 사회운동-자원봉사 등 노익장 과시

  • 입력2007-04-05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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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인들은 표를 만들고 순위 매기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런 영국인들이 일천년대를 마감하는 이즈막에 잠잠히 있을 리가 없다. 요즘 영국 미디어는 거의 한 주일에 한 두 개씩 각종 밀레니엄 순위 보고서를 발표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 가장 좋은 각급 학교 500개, 밀레니엄에 가볼 만한 유럽의 이벤트 50, 최고의 음악가 20명, 최고의 노래 10곡, 여왕의 만찬에 초대된 당대 영국 최고의 인물 300인, 영국 역사상 가장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했던 총리 8인, 각계 선두주자들이 뽑은 ‘우리 분야의 최고’ 시리즈 등 늘어놓자면 끝이 없다.

    노인만 출연하는 연속극 인기

    물론 영국 사람들이 뽑은 것이니만큼 우리에게 낯선 이름도 많고 공감이 가지 않는 결과도 많다. 그중 재미있던 것이 11월12일 발표된 ‘가장 아름다운 여인 20’이다. 우리 시대의 ‘취향’을 후손들에게 전할 목적으로 실시된 이번 ‘미인’ 조사의 결과는 유럽에서 가장 큰 타임캡슐에 사진과 함께 저장돼 1000년 동안 영국 남부 서리(영국에서 제일 부유한 지역이다)에 묻히게 된다.



    그 조사에서 1위는 66세의 이탈리아 여배우 소피아 로렌이 차지했다. 20위까지 전원이 20대 후반 이상이다. 30대가 대종을 이루는 가운데 40대의 할리우드 배우 미셸 파이퍼, 가수 마돈나, 케임브리지대 수학과 출신의 오락프로그램 진행자 캐럴 보더만, 50대의 조애너 럼리(54세의 이 코미디언은 또다른 조사에서 70세의 스코틀랜드 출신 배우 숀 코너리와 더불어 밀레니엄의 아침에 함께 눈을 뜨고 싶은 최고의 연인으로도 선정됐다), 컨트리 가수 돌리 파턴, 60년대 배우로 환갑을 넘긴 라켈 웰치 등 원로들이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확실히 영국인들의 미의식은 우리와 차이가 있다. 그들은 착하고 평범해 보이는 얼굴을 좋아하고, 할리우드식 미의 고정관념을 배격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 조사에서 읽어낼 수 있는 또 다른 영국의 면모는 바로 ‘노인들의 목소리 내기’다.

    영국의 노인들은 은퇴해서 연금에 의지해 살지라도 세상이 젊은이들에게 휘둘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문조사든 토론 프로그램이든 독자의 소리 난이든 가두시위든, 기회만 있으면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그것이 반영되도록 한다.

    지난 11월초, 병원에서 소홀히 취급받았다고 생각한 한 노인이 ‘의료보험이 연령차별을 한다. 병원이 치료효과가 빠른 젊은이들을 우선하고 있다’고 신문에 투고했다. 이 짧은 독자 투고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일주일 내내 각종 신문 방송의 특집 기사, 토론 프로그램의 소재가 됐고 의료보험 담당 고위직이 BBC방송에 나와 진땀 흘리며 해명하는 풍경을 연출했다.

    얼마 안있어 발표된 재무상 고든 브라운의 예산 계획서에는 75세 이상된 연금 수혜자들에게는 TV시청료(1년에 20만원 가량)를 면제해주고 겨울철 난방료로 연 20만원을 지급한다는 것이 대표적 안으로 제시됐다.

    방송진행자가 젊은 사람으로 바뀌면 단박에, 경륜을 신선한 얼굴 하나와 맞바꿨다는 제목을 단 기사가 큼지막하게 신문 지면을 차지한다. 그러고 보니 특히 BBC의 경우 어린이 프로그램과 심야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젊은 진행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첨단 프로그램인 Tomorrow′s World 진행자도 방송 기자 경력 37년의 피터 스노(채널4 뉴스 앵커인 존 스노의 아버지)다.

    출연자 전원이 노인으로 이루어진 연속극이 인기를 끌고, 왕년의 연예인들과 함께하는 토크쇼들이 방송마다 넘친다. 흘러간 옛 노래를 듣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젊은층은 스스로 CD를 사서 개인용 하이파이로 듣기 때문에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의 주 청취층은 60대 이후가 됐다.

    흑백영화도 거의 매일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단순한 ‘절약’ 이상의 의미가 있다. 맥도널드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깜찍한 광고도 내보내지만 초기의 촌스러운 흑백 광고도 심심찮게 내보낸다. 왕년의 광고를 리바이벌해 향수를 자극하고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은 영국 광고사들이 주기적으로 써먹는 수법이다. 영국 중부지역에서 사업하는 한 전직 시의원은 이를 “경제력을 갖고 있는 이가 나이든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영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부모의 집에서 8km 이상 떨어져 살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도 이 ‘경제력’과 무관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은발은 방송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계속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대학 강의실, 스포츠센터, 슈퍼마켓, 도서관, 자원봉사 단체… 어디를 가나 젊은이 못지 않게 활동하는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처럼 하얀 턱수염으로 뒤덮인 앤디(65)는 은퇴후 ‘지뢰 철폐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대인지뢰 제거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워릭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한편 효과적인 캠페인을 펼치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이미 짐바브웨 지뢰제거운동에 깊이 관계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스포츠센터에 가서 체력을 다지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1998년 7월말 통계에 의하면 영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는 40대 이상의 만학도는 22%에 달한다. 머리가 온통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 강좌당 적어도 서너명은 쉽게 발견된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함께 강의를 들으며 즐기는 모습도 드물지 않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동네마다 있는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이나 조깅, 베드민턴이나 테니스 등을 가족 단위로 함께 즐긴다. 할아버지들이 손자들을 몰고 공원에서 조깅하고 미니 골프를 치는 모습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40년 동안 거의 매일 1km씩 수영해 왔다는 스티브. 자녀들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 일과가 되었단다. 자녀들은 그 동안 다 성장해 독립했고 그 중 지난 20년은 혼자 수영했지만 요즘은 손자들을 동반한다. 제니(63)의 아버지는 아흔살을 훌쩍 넘긴 고령이지만 1주일에 한번 하는 컨트리클럽에서의 골프를 거르지 않는다. 이러니 자동차도 헉헉거리는 알프스 준령에서 산악 자전거를 타는, 산양 같이 날렵하고 단단한 몸매의 노인을 만나는 것이 놀라울 것도 없다.

    60세가 넘었지만 아직도 동네에서 알아주는 전기수리기사인 봅은 3~5년에 한번씩 해외 여행을 간다. 장소가 결정되면 아내와 함께 그 나라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지도를 사고, 도서관에 가서 ‘연구’를 한다. 그렇게 스페인과 그리스,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익혔다. 2, 3년 공부한 언어실력이 막상 그 나라에 가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익히 알고, 번번이 아내의 외국어 실력에 뒤지기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준비한 만큼 얻는 것도 많고 알뜰여행을 즐길 수 있어 은근히 자랑스럽다.

    영국에도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이 많다. 동남아시아 섹스관광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예순살이 넘은 카사노바가 흔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 노인들의 공통적인 특질은 독립적으로 인생을 즐기고자 하는 태도다. 연령 차별이 최근의 중요한 사안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들의 목소리가 사회통념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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