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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무너지는 국가 기강

공권력 추락…나라 꼴이 기가 막혀!

‘옷사건 파문’으로 도덕성-신뢰에 치명타… “믿을사람 하나 없다”

공권력 추락…나라 꼴이 기가 막혀!

공권력 추락…나라 꼴이 기가 막혀!
정부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이 정부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전인 94년 10월21일 당시 민주당 이기택대표가 국회 본회의 정당대표 연설에서 김영삼정부의 개혁 1년8개월에 대해 진단하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작금의 상황이 그때와 똑같기 때문이다. 박주선전청와대법무비서관이 김태정전검찰총장에게 ‘사직동 최종보고서’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대중대통령의 말은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탄식이었다. 이 말은 김영삼전대통령의 “우째 그런 일이…”와 정확한 동의어다.

신동아그룹이 최순영전회장의 구속을 면하기 위해 펼친 로비는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한 로비’는 ‘성공한 로비’ 이상으로 현 정권의 도덕성과 권위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원인은 간단하다. “공직자 남편을 둔 부인이 비싼 옷을 산 것을 감추려다 일이 이렇게 됐다”고 지적한 김대통령의 말이 모든 정황을 설명해준다. 처음에 모든 것을 사실대로 얘기하고 용서를 빌었으면 간단히 끝날 일이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은 정권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

우선 국가 기강의 해이 문제가 심각하다. 11월27일 민주신당추진위 지도부와의 조찬에서 김대통령이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서가 유출되고 심지어 피의자측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밝힌 것처럼, 고위층 인사들의 기강 문란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는 거의 파탄 수준이다.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진 책임자 행태에 분노



법무비서관이 사건을 축소은폐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나 이 보고서가 검찰총장에게 전달된 것, 이어 검찰총장 방에서 ‘로비스트’ 박시언씨에게 유출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경악할 만한 일이다. 만약 김전총장이 이를 고의적으로 방조했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사안의 심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진 사정당국 핵심 책임자들의 행태에 앞으로 국가 기강 확립의 영(令)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검찰에서는 서경원전의원 사건 재조사로 검사가 검사를 불러 조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옷사건으로 전직 검찰총장과 법무비서관이 구속될 처지에 놓였다. 국가기강의 초석이어야 할 검찰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검찰조직뿐만이 아니다. 경찰 국정원 국군기무사 등 모든 공권력의 기강과 권위가 추락하고 있다. 최근 인천 호프집화재참사 수사를 통해 경찰 일선의 ‘비리 커넥션’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 대한 경찰의 비호 사실이 줄줄이 드러남으로써 경찰조직 역시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호프집참사 역시 근본적인 원인은 경찰조직의 기강 해이였다. 문제는 경찰 총수의 전격적인 경질만으로는 경찰 일선의 비리와 책임의식 결여 문제를 치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지난 11월12일 폐막한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총회는 ‘서울선언’으로 명명한 ‘법집행 공무원의 부패방지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를 보면 “부패한 경찰관은 국민의 신뢰와 믿음을 손상시키고, 사회정의 추구에 있어 방해물이며, 범죄와의 싸움을 비능률적으로 만드는 주범”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검찰이나 경찰 등 공권력의 권위 추락은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은 이종찬전원장이 퇴임후 내부문서를 밖으로 가져나온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던졌다. 기무사는 병역비리수사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다. 청와대 검찰 경찰 국정원 기무사 등 국가공권력 어느 한곳도 성한 데가 없이 모조리 중병이 들었다. 기강도 권위도 신뢰도 모두 잃었다. 상황이 이런 데도 여권은 적절한 대책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내년 총선뿐인 것 같다. 야당은 야당대로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골몰해 있다.

최순영전신동아그룹회장 구명 로비 사건은 얽히고설킨 ‘인맥 정치’와 맞물려 돌아가는 국정운영 체계의 폐단도 아울러 적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태정전총장을 법무장관에 기용할 때 여권 일각에서는 이를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 정부 주도세력은 박주선법무비서관에 이어 그의 고교선배인 김전총장을 법무장관에 앉혔다. 검찰 사상 초유의 항명파동까지 겪은 김전총장에 대해서는 안팎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같은 소리들은 결과적으로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거나 무시됐다.

고급옷 로비 의혹이 처음 제기된 지난 5월에도 적어도 5개 이상의 보고 채널에서 대통령에게 ‘김태정-박주선 경질 건의안’이 올라갔다는 것이 여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대통령의 상설 채널은 총리실, 국민회의, 청와대 비서실, 국정원, 검찰, 경찰 등이다. 옷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던 6월1일에는 김종필총리가 몽골 방문중인 김대통령에게 전화까지 걸어 “국내 여론이 심각하다”며 “결심을 하셔야겠다”고 재촉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통령의 ‘마녀사냥론’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대통령의 보고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통령 직보체계가 김중권실장과 박주선비서관에게 너무 집중돼 있다는 비판론이었다. 그래서 김태정전장관 사퇴 이후인 6월22일에는 민정수석실이 부활되었다. 민심 전달 체계를 다각화한다는 취지였지만, 결과적으로 옷사건의 은폐와 축소 기도를 막지 못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대통령사과가 아니다”

따라서 김대통령이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 한 청와대의 국정운용 및 위기관리 능력은 개선되기 힘들다는 지적도 많다. 청와대의 A비서관은 “김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비서실에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개개인에 권한을 주어야만 명백한 책임이 뒤따를 수 있다. 예를 들어 YS시절에 강삼재총장과 이원종수석에게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여론이야 어쨌든 ‘정권 보위’에 몸을 던졌다. 당정이나 당과 청와대의 의견 조율에도 혼선이 생길 리 없었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 정권에서 어떤 사람이 과연 이들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고 말한다.

결국 ‘책임 행정’과 이를 뒷받침할 ‘인적 자원’의 부재가 위기관리 능력의 F학점 요인이 된다는 얘기다. 인천 호프집화재참사와 맹물전투기 추락사고 등에서 대통령의 문책 의지는 별로 발휘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 상실과 민심 이반으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별 것’ 아닌 아낙네들의 옷사건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몸 바쳐’ 뛸 ‘충복’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한 번쯤 귀담아 들을 만한 일이다. 한나라당 강삼재의원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영삼정부 말기에 한보사태가 터지고 현철씨 문제가 비화되면서 YS가 침체 상태에 빠질 때가 많았다. 어떤 경우는 서류 결재가 일주일 이상 밀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비서실에서 내게 ‘헬프 사인’이 들어왔다.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YS를 위무해야 비로소 국정 운용이 제대로 돌아갔다. YS는 내게 절대적인 신뢰와 권한을 주었다. 그러니 어찌 정권 보위의 총대를 메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비난 여론 두 번째 문제였다.”

김대중대통령은 11월25일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국민이 진짜 원하는 것은 대통령의 사과가 아니다. 사과 이후에 단행될 대통령의 통합적 지도력에 대한 기대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현재의 분위기와 YS 임기말 때의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현 정권의 곳곳에서 벌써부터 권력누수현상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YS는 임기 일년 전에 무너졌으니 막무가내로 포기하고 버틸 수나 있었지만, 김대통령은 임기가 3년이나 남았으니 그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와 연관해 “집권 2년차의 ‘실정’을 회복할 시기가 3년이나 남은 것이 어떻게 보면 기회일 수도 있다”는 얘기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집권 세력에 정말로 잔치는 끝난 것이다.

눈 가린 DJ, 귀 막은 DJ?

참모진 의견 제대로 반영 안돼 … ‘보고’ 특정인에 집중도 문제


일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과연 청와대비서실은 무엇을 했나. “청와대 보좌진에 문제가 있다”는 최근 자민련 박태준총재의 말은 비록 전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올바른 지적이 되고 있다.

청와대 B비서관의 얘기. “김대통령은 정리된 견해나 보고서를 싫어한다. 그냥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팩트’(사실)만을 요구한다. 판단은 자신이 한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현안에 대해 참모진의 의견에 앞서 자기 견해를 먼저 말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참모진의 침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6월초 김대중대통령이 몽골 방문에서 돌아와 옷사건의 수습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김대통령이 먼저 김태정전장관의 유임을 밝히는 바람에 당시 김정길정무수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 김수석으로서는 김전장관이 퇴임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일치된 견해를 보고할 작정이었으나 대통령의 분위기에 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중권실장에게 정보, 인사, 예산 등 모든 것이 집중된 것도 난맥상의 한 원인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정무수석의 경우 검찰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야만 정치권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데, 검찰 보고가 김실장 라인에만 집중되고 정무수석실은 ‘깜깜’하다 보니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뒷북’을 치는 일이 많았던 것. 김대통령도 물론 처음에는 “정치는 다 정무수석이 알아서 한다”며 김전수석에게 힘을 실어주었지만, 갈수록 그 힘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 있었다는 얘기다.

청와대 C비서관은 “비서실의 한 축에만 너무 막강한 권력이 쏠리게 되면 장관은 허수아비가 되고 행정이 발전하지 못하며,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 올라온다. 비서실의 ‘실세’는 결국 대통령의 부담이다”고 말한다. 결국 비서실 내부의 적절한 견제에 이상이 있었던 셈이다.




주간동아 212호 (p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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