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08

1999.11.11

대우 늑장 처리 “부실만 키웠다”

핵심계열사 워크아웃 불발… 투신사 구조조정 늦어져 금융 불안 가중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7-02-13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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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정부의 과욕임이 드러났다. 대우 계열사 12개에 대한 워크아웃 계획을 11월6일까지 모두 수립하겠다던 이기호 청와대경제수석 등 경제팀의 공언은 빗나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대우 채권단 운영위원회가 10월29일 확정한 워크아웃 계획에서 자산 규모 5조원 안팎의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등 핵심 계열사들은 하나같이 배제되고 말았다. 당초 정부 약속대로 10월말까지 워크아웃 계획이 드러난 대우 계열사는 대우전자부품, 경남기업, 오리온전기, 쌍용자동차 등 4개 기업에 불과하다. 워크아웃이 확정된 4개 기업 중 쌍용자동차와 오리온전기부품만 자산 규모가 각각 2조7000억원과 1조9000억원에 달할 뿐 나머지 기업들은 자산 규모가 5000억원 내외로, 대우 계열사 중에서는 군소 규모 업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우가 밝힌 계열사 총부채 60조원 중에서 80% 이상을 차지하는 50조원 가까운 빚을 지고 있는 ㈜대우, 대우자동차, 대우전자, 대우중공업의 워크아웃 계획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쌍용자동차는 그나마 4조원 가까운 총 부채 중 3% 정도에 불과한 1300억원만 출자 전환하고 향후 제3자 매각을 위해 수출 금융 형태로 2880억원을 새롭게 쏟아부어야 할 형편이다.

    10월말까지 계획을 확정하기로 한 대우의 7개 계열사에 대한 조기 워크아웃 계획 수립이 일단 불발로 끝난 것은 무엇보다도 해외 채권단을 워크아웃 작업에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지에 대한 최종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11월6일까지 확정하기로 했던 나머지 5개 주요 계열사들의 워크아웃 계획 작성도 늦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해외 채권은행 관계자들은 지난 10월29일 도쿄에서 채권단 회의를 개최해 국내 채권단 및 기업구조 조정위원회와 협상을 벌였지만 대우 부채에 대한 정부의 지급보증 요구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미국계 해외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동등한 대우(equal treatment)라는 내용없는 원칙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물론 해외 채권단의 강경 자세에 대한 비판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제금융센터 어윤대 소장은 “외국계 은행들이 한국이 IMF 체제에 막 접어들었을 때 받았던 일종의 ‘특혜성’ 대우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일부 해외 채권은행들이 뉴브리지 캐피털에서 제일은행을 인수할 때 적용했던 향후 2년간의 대우 관련 부실 여신을 정부가 떠안아 주기로 한, 이른바 ‘풋 백 옵션’ 조항을 들어 자기들도 이번 대우사태 처리 과정에서 이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는 사실상 ‘동등한 대우’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것이 금융권의 지적이다. 해외 채권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 주한 외교관 역시 이런 주장이 무리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외 채권단들은 10조원에 이르는 담보를 적정 배분하고 워크아웃 과정에서 동등한 지위를 보장할 수 있도록 협약을 개정하겠다는 정부의 ‘달래기’만으로는 대우 부채의 지불 유예에 합의해 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이들을 설득할 만한 묘수가 나오지 않는 한 대우 사태는 앞으로도 혼미한 국면을 벗어나지 못할 전망이다.

    또한 해외 채권단이라는 암초에 걸려 대우 처리 문제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금융시장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투신사들의 구조조정도 덩달아 늦춰질 수밖에 없게 됐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일단 한국투자신탁에 2조원, 대한투자신탁에 1조원 등 3조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한 뒤 코스닥에 상장하거나 해외에 매각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복병은 수없이 숨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투신사, 증권사간의 손실분담률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의 문제다. 일단 정부는 투신사에 운용을 잘못한 죄를 따지고, 증권사에 수익증권을 판매하면서 고객들에게 ‘거짓 홍보’한 책임을 물어 대우 채권으로 인한 손실 금액을 분담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가이드라인에 불과할 뿐 구체적 지침을 제시한 것은 아니어서 결국 투신사건 증권사건, 자기 주머니를 털어야 할 상황이 오면 금융당국의 개입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자칫 이 과정에서 손실 분담에 대한 이견 조정에 실패하면 결국 그 몫은 다시 공적 자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추경 예산 편성 없이 투신사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을 마무리한다는 정부의 계획이 결정적으로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대목이다.

    투신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환매 사태에 따르는 금융시장의 불안정 요인은 역시 도사리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금융대란과 관련해 정작 위험한 요인은 대우채권 환매 사태보다도 투신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환매 러시가 될 것이다”고 우려했다. 투신사가 보유한 채권을 시가로 평가할 경우 위험부담에 익숙지 않은 투자자들에게 원금 손실에 따른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대량 환매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가 대우사태와 투신 구조조정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처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영락없이 ‘닮은 꼴’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뇌관을 제거한 뒤 폭발물을 안전하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이미 지난 4월 금융연구원을 비롯한 몇군데의 정책 라인에서 대우의 워크아웃을 건의하는 극비 보고서가 나오는 등 경제 전문가들이 대우의 조기 처리를 주장했지만 정부는 그동안 이를 묵살해 왔다. 결국 뒤늦게 대우 계열사들의 워크아웃이 결정된 뒤 정부 관계자들은 대우가 이미 그 당시 ‘기술적 부도’ 상태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 인식에는 동의하면서도 ‘금융시장이 혼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경제 회복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당시에 워크아웃 방침이 나왔었더라면 다시 우리 경제 전체가 곤두박질쳤을 것’이라는 결과론을 내세웠다. 한마디로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경제가 활력을 회복해 환자가 수술을 버텨낼 수 있는 상태가 된 다음에야 대우그룹에 메스를 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투신 구조조정도 마찬가지다. 부실 덩어리에 불과한 투신사들을 하루빨리 처리하는 것이 시장의 불확실성을 없앨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경제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랐지만 정부는 대우사태 처리 당시와 같은 ‘속도 조절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단계적 대책이 얼마나 먹혀들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대우에 대한 외과적 수술에 뒤늦게 착수함으로써 전혀 몰랐던 새로운 상처가 드러나고 회복 속도가 늦어지는 것을 보면 투신사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결국 내년 초까지도 우리 금융시장은 인화 물질을 품에 안고 불안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 여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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