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7

2016.07.20

사회

여 아나운서 노리는 ‘나쁜 손’

일자리와 경력 절박한 지망생들에게 갑질…당하고도 ‘버릇없는 애’로 몰릴까 쉬쉬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입력2016-07-15 15: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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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랜서 아나운서 A(24·여)씨는 최근 한 방송사 일을 그만뒀다. 방송사 PD의 ‘나쁜 손’ 때문이다. PD는 녹화장에서 인사할 때마다 A씨의 어깨를 만졌는데 A씨는 PD에게 밉보일까 봐 항의하지 못했다. 그렇게 일한 지 한 달, PD가 저녁 회식 자리에서 A씨의 허리를 만졌다. 당황한 A씨가 PD에게 항의하자 그는 오히려 화를 내며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일 그만두고 싶으냐”고 말했다. 며칠 후 A씨는 PD로부터 구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더는 나올 필요 없다. 너 말고도 실력 있는 애들 많다.” A씨의 첫 방송사 일은 두 달 만에 끔찍한 경험으로 끝났다.

    아나운서, MC, 리포터 등 방송진행자는 남의 이목을 끄는 직업 중 하나다.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목소리, 능숙한 화술은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아나운서 중에서도 프리랜서의 실상은 화려하지만은 않다. 그들에겐 불안한 고용 상태와 이를 악용하는 성희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사회 경험이나 방송 경력이 별로 없는 초보 아나운서나 지망생을 대상으로 이러한 악행이 벌어진다. 업계에서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라면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두 번은 한다”는 말이 흔할 정도다.

    전국에서 활동하는 아나운서 중 프리랜서는 몇 명일까.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체 아나운서의 90%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상 ‘한국 프리랜서 방송진행자 연합’ 회장은 “케이블TV방송이나 종합편성채널은 물론, 지상파 방송국 아나운서도 계약직, 프리랜서가 느는 추세다. 프리랜서는 고용계약에서 정규직보다 불안정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방송사 또는 방송제작업체가 ‘고용 갑질’을 휘두르기 쉽다”고 말했다.



    “인맥 넓힐 기회” 회식의 유혹

    실제로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채용할 때 계약서를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6개월~1년 등 단기채용이 부지기수다. 특히 계약서 없이 활동하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다. 아나운서를 꿈꾸는 지망생은 많지만 방송 기회는 한정돼 있기 때문. 매년 아나운서학원에서 배출하는 졸업생이 4000~5000명이나 된다.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겪는 성희롱은 방송 제작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송사가 프로그램 제작을 외주업체에 맡길 경우 외주업체 PD가 아나운서 채용을 담당하기 때문. 프리랜서 아나운서 B(24·여)씨는 “아나운서 지망생들 사이에서 악덕 외주업체 ‘블랙리스트’가 떠돈다. 아나운서계에 막 발을 디딘 사람에게 성적 모욕을 주거나 출연료도 제대로 안 주고 해고하는 업체들”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 케이블TV방송사의 프로그램 외주업체는 악명이 높다. 아나운서를 실력이나 경력이 아닌 PD의 개인 취향대로 뽑는데, 뽑자마자 저녁 회식에 불러내 노래나 춤을 시킨다. 그 업체 회식 자리에 갔다 바로 그만둔 아나운서가 수두룩하다고 들었다.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려 하면 ‘방송에서 뺀다’고 협박하거나 ‘실력도 없는데 방송에 넣어준 걸 고맙게 알아라’는 식의 폭언이 돌아온다. 녹화 도중 ‘섹시하게 하라’ ‘성형 좀 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업계에서는 “군소 방송사에서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한 방송계 관계자는 “아나운서학원이나 인력채용업체에 수시로 채용 공고가 올라오는데, 이 공고를 낸 업체가 제대로 된 방송사인지 알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프로덕션’ ‘◯◯인터넷방송’이라는 이름과 연락처만 올리면 아나운서 지망생은 그곳이 어떤 업체인지 알 길이 없다는 것. 이 관계자는 “허위 방송업체가 아나운서 면접을 본다며 지망생을 술집에 불러놓고 그다음 날 연락이 끊긴 적도 있다. 지망생이 업체에 항의하니 ‘편한 분위기에서 오디션 좀 보자고 한 건데 뭐가 문제냐. 우리는 채용을 보장한 적 없다’며 발뺌했다는 소문도 들었다”고 전했다.



    ‘참신한 신입’이 아니라 ‘순종적인 여성’ 원해

    하지만 신입으로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방송 관계자가 권유하는 모임, 회식을 마냥 거절하기도 힘들다. 방송 관계자가 “인맥을 넓히는 자리”라고 설명하면 혹시나 정규직 채용의 길이 열릴까 싶어서다. 하지만 이 같은 설명은 젊은 여성을 모임에 불러내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7년 차 아나운서 C(33·여)씨는 “신참 프리랜서일 때 ‘지상파 방송사 국장이랑 유명 MC,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온다’는 자리에 몇 번 갔었다. 모임을 주도한 PD는 ‘이분들에게 잘 보이면 나중에 좋은 기회가 열릴 것’이라며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없었고 모임 참석자 몇 명이 치근댈 뿐이었다”고 털어놓았다. C씨는 “방송 관계자들은 조금이라도 경력을 더 쌓으려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순진한 후배 아나운서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 텐데 정말 말리고 싶다”고 말했다. B씨도 “이러한 피해를 겪다 보니 ‘참신한 신입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뽑는다’는 말에 주의하게 됐다. 악덕업체가 원하는 ‘신입’은 PD의 도덕성을 의심하지 않을, 어리고 순종적인 친구들이다. 그렇게 신입을 뽑아놓고 ‘왜 그렇게 실력이 없느냐’고 폭언하고 무안을 주는 경우가 잦다”고 말했다.

    이렇게 상처받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갑질을 한 방송 관계자를 고발하고 싶어도 별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업계에서 ‘버릇없는 애’라는 소문이 나 향후 진로에 피해를 볼까 두렵기 때문이다. 정규직을 지망하는 프리랜서 아나운서 D(27·여)씨는 “결국 홀로 강해질 뿐이다. 혹시나 누군가 불쾌한 농담을 하면 웃으며 강하게 맞받아치든지 신경을 안 쓰는 방향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고 말했다. D씨는 “프리랜서로 아나운서계에 입문할 때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나운서학원도 이런 나쁜 관행을 알면서 쉬쉬하고, 졸업생이 부당고용이나 성희롱에 대해 상담하러 와도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방송계 일각의 악습, ‘예쁘고 어린’ 지망생을 만만하게 보는 관행은 지금도 힘없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을 울리고 있다. 이기상 회장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의 피해는 지금까지 내부에서만 공론화됐다. 이제는 외부로도 알려져야 한다”며 “한국 프리랜서 방송진행자 연합은 앞으로 이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피해를 공론화하는 데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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