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28

2020.02.28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공연 취소와 음악의 꿈

엘리엇 타이버의 ‘테이킹 우드스탁’을 다시 읽으며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20-02-26 11:25:24

  • 글자크기 설정 닫기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 [SOUND MEDIA]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 [SOUND MEDIA]

    주말에 날아드는 소식에 공통으로 들어간 단어는 둘 중 하나였다. ‘취소’ 아니면 ‘연기’. 공연과 행사를 가리지 않고 취소되고 기약 없이 연기됐다. 잡혀 있던 인터뷰도 취소 요청이 들어왔다. 어쩌겠나. 역병이 사그라진 후 만나자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음악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희노애락에 포함되지 않는 근심과 중압이 저기압의 구름처럼 머리위에 맴돈다. 멍하니 앉아 책꽂이를 봤다.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킹 우드스탁’. 

    1969년 미국 뉴욕주 시골에서 열린 행사이자 현대 록페스티벌의 시원이며 페스티벌이 거대 산업화된 지금도 기획자와 참가자 마음 어딘가에 깃들어 있는 축제의 이상향인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대한 회고적 기록이다. 이 책이 새삼 눈에 들어온 이유는 ‘테이킹 우드스탁’만큼 시궁창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고 진솔하게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어서다. 책의 전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비참하고 꿉꿉한 기분이, 카카오톡 메시지 목록을 가득 메운 ‘취소’와 ‘연기’의 무게와 닮았던 것이다. 

    많은 전설적 사건은 결과로 기억된다. 그 결과로 가는 과정은 담론이니 사회상이니 하는 거창한 틀에 의해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우드스톡 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저항과 자유, 사랑과 평화, 히피와 플라워운동 등 1960년대를 관통했던 정신의 총화로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이야기된다.

    대중음악의 요순시대

    '테이킹 우드스탁' 표지(왼쪽). 엥리엇 티버. [문학동네 제공, Author Learning Center 유튜브 캡처화면]

    '테이킹 우드스탁' 표지(왼쪽). 엥리엇 티버. [문학동네 제공, Author Learning Center 유튜브 캡처화면]

    1969년 8월 15일부터 나흘간 뉴욕주에서 열린 이 페스티벌은 최소 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가는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아예 차를 버리고 걸어서 이동한 이들도 적잖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예상 인원은 15만 명가량이었지만 중간에 펜스가 부서지면서 두 배의 관객이 더 들어갔다. 이 중 절반은 펜스를 부수고 무단으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포크와 블루스, 사이키델릭과 솔 등 당시 청년 문화를 대표하던 뮤지션이 모두 무대에 올랐고 그들은 음악사에 영원히 회자될 전설적인 순간을 남겼다. 아니, 우드스톡 페스티벌 그 자체가 전설이 됐다. ‘사랑과 평화의 여름’이란 이름으로. 전 평화운동과 히피운동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의 정점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이, 이 페스티벌을 직접 경험할 수 없던 나라의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스펙터클과 드라마에 상상의 양념이 더해져 동양에서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중국 요순시대 같은 존재가 됐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우드스톡 페스티벌 이 열린 시골의 소년이었으며 이 페스티벌의 숨은 공신인 엘리엇 타이버는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그 거대한 담론 뒤편의 이야기를 다룬다. 반드시 그런 거창한 담론만이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책은 축제의 동기를 제공하게 된 어느 가족을 따라간다. ‘막장가족’이다. 무능한 아버지, 완고하고 억척스러운 어머니, 그리고 그 부모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아들 엘리엇. 엘리엇은 오직 가족의 빚을 청산하려 좌초될 위기에 놓인 우드스톡 페스티벌 기획자들에게 연락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망해가는 마을의 망해가는 모텔에 모여든다. 그 과정을 통해 뉴욕 인근에 쇠락하던 마을 벤슨허스트는 세상의 중심이 되고, 가족은 난생처음 겪는 활기에 만세를 부른다. 그리고 1969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린다. 모텔에서 페스티벌 뒤치다꺼리를 하던 엘리엇도 마지막 날 축제의 현장에 간다. 그것은 엘리엇에게 천국과 다름없었다. 상상할 수 없던 자유, 기대하지 않던 경험, 무엇보다 음악이 만들어낸 행복이 난데없이 시골 농장에 찾아온 것이다. 

    300여 쪽을 넘기다 보면 전율이 솟는다. 이 회고록은 이안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었는데, 혹시 영화만 보고 이 책을 짐작하면 오산도 그런 오산이 없다. 이 책을 다시 꺼내 든 이유이기도 한,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은 엘리엇의 배경 때문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 공연사진 [GettyImages]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 공연사진 [GettyImages]

    어린 시절의 뒤틀린 경험으로 인해 동성애자, 마조히스트, 마약 중독자가 됐던 그는 뉴욕에서 동성애 인권운동을 만나며 성장기 내내 자신을 따라다닌 자기 모멸에서 벗어난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기획과 개최에 우연히 휘말리며 비로소 지옥에서 걸어 나와 현실의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1960년대 카운터컬처(반문화)의 생성과 부상과 폭발이 엘리엇 개인의 삶에 오롯이, 또한 극적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그의 삶을 통해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담론이 아닌 실체로서 그 시절 그 장소로 우리를 이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1960년대의 정신이 폭발한 우드스톡 펫페스티벌. 물론 음악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엘리엇과 그 가족의 삶을 바꾸었다. 단순히 경제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 아니다. 더는 불행할 수 없을 정도의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만 하던 엘리엇은 우드스톡에 얽히면서 후일 극작가로 성장할 원동력, 긍정적 자아를 찾는다. 힘없는 ‘마초 꼰대’였던 아버지에게 전혀 보이지 않던 활력이 샘솟고, 죽어 있던 마을이 되살아난다. 

    개인과 가족의 한 시기를 통해 책은 결국 시대를 담아낸다. 20세기 대중문화가 혁명적으로 만개하던 그 시대는 비틀스와 밥 딜런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두가 새로운 음악을 꿈꾸고 동경했다. 인류가 겪지 못한 대중문화의 꽃밭을 일궈냈다.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을 실천하며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비록 그 모든 실험은 1970년대와 함께 한물간 유행처럼 돼버렸지만 1960년대라는, 그리고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라는 이상향을 후대의 기억 속에 강렬히 심어놓았다. 

    책장을 덮으며 지금을 생각한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대형 페스티벌이 열린다. 록페스티벌뿐 아니라 EDM, 힙합 등 장르도 다양하다. 수만에서 수십만 인파가 몰리지만 운영은 치밀하고 상상력보다는 자본력이 압도한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혁명과 이상향을 꿈꾸기보다 소비자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누가 나오고, 뭘 먹을 수 있고, 잠은 어떻게 자고 등 이런 것들이 페스티벌을 고르는 최우선 기준이 된다. 페스티벌은 그렇게, 음악산업의 효자상품이 돼버렸다.

    1994년 개최 25주년을 맞아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다시 열렸다. 1969년만큼은 아니었어도 전 세계 음악 팬들의 주목을 끌었다. 지난해 5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큰 페스티벌로 그 ‘역사적 몽상’을 기념할 예정이었지만 행사를 한 달 반 남짓 앞두고 취소됐다. 스폰서도 취소되고, 장소도 구하지 못한 탓이었다. 몽상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세상의 반영 같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지금 이곳의 온갖 ‘취소’와 ‘연기’ 소식을 들으며 뜬금없이 생각했다. 이제 음악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