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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군복처럼 보이지만 연대감 느낀다

음악 취향을 표현한 밴드티셔츠

군복처럼 보이지만 연대감 느낀다

[pixabay]

[pixabay]

얼마 전 한여름을 맞아 옷 정리를 하던 중 아내가 한마디 했다. “오빠도 참 대단하다.” 수십 벌에 이르는 밴드티셔츠(밴드티)를 보고서다. 생각해보면 결혼 전에는 밴드티를 제외하고는 여름옷을 산 적이 없다. 내한공연이나 페스티벌에서 파는 투어 한정 머천다이즈(MD)를 음반처럼 사 모았다. 그러다 보니 밴드티가 여름 유니폼이 됐다. 사진을 찍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가면 어떤 밴드티를 꺼내 입을지 고민하는 게 일이다.


‘닥치고 블랙’인 이유

패션에서 자기 스타일을 갖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남자는 더욱 그렇다. 내가 사는 홍대 앞을 관찰해봐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옷 잘 입는 남자들이 다 모이는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와, 저 형 ‘간지’ 터진다”고 할 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상의를 보면 대부분 흰색 무지 티셔츠에 꽈배기 니트를 입는다거나, 브이넥 셔츠에 카키색 야상을 걸친다. 바지는 너나없이 스키니, 혹은 슬림핏의 청바지나 단색 면바지다. 헤어스타일과 신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음악으로 치자면 흔해 빠진 달달한 싱어송라이터 스타일이랄까. 툭 까놓고 말하면 여자들에게 무난하게 인기 끌 수 있는 스타일인 것이다. 어쨌든 시대를 막론하고 ‘댄디’한 남자는 여대생들의 소개팅 희망 1순위니 말이다. 뭐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질투에 가깝다. 적어도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즉 반팔을 입는 계절에 한정하자면 나는 결코 그런 댄디함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주적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밴드티다. 

보통 옷을 살 때는 디자인과 소재, 핏 등을 고려하지만 밴드티는 그런 원칙이 통하지 않는다. 프린트 디자인과 프린트 디자인, 그리고 프린트 디자인, 그게 전부다. 몇 가지 전제 조건은 있다. 미국 밴드의 경우 평소 입는 사이즈보다 한 사이즈가량 줄여서, 영국과 일본은 평소 사이즈에 맞춰 사면 된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그다음은 색상인데, 밴드티의 90% 이상이 검은색으로 제작된다. 블랙 말고 다른 색상 옵션이 있다면 다행인데, 메탈이나 하드코어 등 ‘빡센’ 장르는 닥치고 블랙만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나의 밴드티 역시 블랙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데, 진작 이런 티셔츠에 질리다 보니 이제는 웬만큼 좋아하는 밴드가 아니고서는 밴드티를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 아닌 장점이 생겼다.


경험으로 쌓은 밴드티 잘 만드는 국가

체인스모커스 밴드티,보위 밴드티,롤링스톤스 밴드티,엘리 굴딩 밴드티(왼쪽부터). [셔터스톡 에디토리얼]

체인스모커스 밴드티,보위 밴드티,롤링스톤스 밴드티,엘리 굴딩 밴드티(왼쪽부터). [셔터스톡 에디토리얼]

그러나 음반산업이 쇠퇴하고 음원산업의 규모가 음반의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지 않는 이 시대에 공연은 음악산업의 헤게모니를 차지한다. 그에 따른 부가가치, 즉 티셔츠를 비롯한 머천다이즈의 중요성도 커졌다. 예전처럼 블랙과 화이트만으로는 시장의 요구를 채울 수 없다. 이에 최근 몇 년 사이 밴드티의 컬러는 놀랍도록 다양해졌고, 나의 행어에는 마치 드림콘서트의 아이돌 팬클럽 풍선 색만큼이나 다양한 색깔의 티셔츠가 걸리게 됐다. 물론 블랙 앤드 화이트 시대의 끝물에 잠시 현상 유지되던 지갑이 다시 얇아지기 시작했지만. 

아, 그리고 또 하나 미리 알아두면 좋은 게 있다. 제조국. 중국이 거의 모든 밴드티를 제작한 시절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실로 다양한 나라에서 밴드티를 만든다. 이는 섬유산업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일 테지만 다행히 ‘주간동아’가 섬유업계 소식지는 아니니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보통 밴드티의 주된 제조국은 중국, 필리핀, 온두라스다(가끔 캄보디아산이 걸릴 때도 있는데 열외로 해도 좋을 만큼 형편없는 품질을 자랑한다. 캄보디아산 밴드티를 샀다면 주저 없이 소장품 목록에 넣거나, 한 번 입고 버릴 각오하기를). 그중 중국산과 필리핀산이 양호하고 온두라스산은 복불복이다. 혼방인 경우 몇 번만 빨아도 보푸라기가 일기 일쑤고, 이른 목 늘어남을 막기 위해 입고 벗을 때 꽤나 긴장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산과 필리핀산은 대부분 ‘평타’는 친다. 이건 어디서도 안 알려주는 정보다. 오직 내 경험의 소산이다. 



“이 옷이 요즘 제일 잘나가요”라는 점원의 말에 혹하는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내 경우 그런 옷은 절대 사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같은 옷을 입은 이를 마주칠 때의 곤란함이란! 밴드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제이슨 므라즈, 뮤즈 등 한국에 팬도 많고 자주 오는 뮤지션의 티셔츠가 내겐 없다. 메탈리카 등 ‘짝퉁’이 넘쳐나는 밴드 역시 마찬가지다. 머천다이즈 판매량이 그리 높지 않은 한국이다 보니, 2000석 규모의 공연장에 내한한 밴드의 티를 입고 다니면 사실상 평생 그 티를 입은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쁘게? ‘말하듯 입는 것’이 밴드티셔츠

코첼라페스티벌에 다양한 밴드티를 입고 참가한 사람들. [AP=뉴시스]

코첼라페스티벌에 다양한 밴드티를 입고 참가한 사람들. [AP=뉴시스]

글래스턴베리, 코첼라, 서머소닉 같은 해외 페스티벌 티는 ‘록부심’을 한껏 부릴 수 있는 아이템이다. 그중 으뜸은 페스티벌이건, 단독 콘서트이건 해외에서 직관한 밴드의 티셔츠. 특히 한국에 온 적 없다면 뭐랄까, “북경에 가서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들여온 조선 사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은 그저 한 ‘덕후’의 착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픽시스, 아케이드 파이어, 콜드플레이의 밴드티를 입고 다녀봤자 거리의 사람들은 한낱 보세 티셔츠 정도로만 생각할 테니까 말이다. 밴드티 가격이 평균 3만5000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요컨대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패션과는 일말의 공통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밴드티는 휴가 때 군복과도 같은 존재다. 아무리 밤새워 전투화에 물광을 내고 전투복에 빳빳이 줄을 세워도 서울역에서 마주치는 다른 부대 군인들이나 관심을 보일 뿐, 민간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군인’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본 적 없는 밴드티를 보면 부러움과 더불어 강력한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괜히 가서 말이라도 걸고 싶다. 산책하다 만나는 애견인의 대화처럼 가볍지만 반가운 대화를 나누고 싶다. 취향의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티셔츠는 가장 개인적인 정치적 선언’이라고 누가 그랬다. 예쁘게 입는 것도 좋지만, 말하듯 입는 것. 밴드티를 입으면 음악 애호가의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다.






주간동아 2019.07.19 1198호 (p76~78)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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