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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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부터 도피, 사랑을 향해 도피

‘다른 남자’(원제 Liebesfluchten)

  • 왕상한 서강대 법학부 교수 shwang@sogang.ac.kr

    입력2009-04-22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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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부터 도피, 사랑을 향해 도피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이레 펴냄/ 344쪽/ 1만1000원

    최근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았다. ‘TV, 책을 말하다’를 진행한 사람으로서 영화는 제목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실로 오랜만에 강렬하고도 진한 느낌을 받았다.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그 속에서 희생양이 된 여주인공 한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문맹이란 사실만은 숨기고 싶은 그녀의 자존심. 결국 법과 정의는 물론,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조차 그런 불쌍한 한나를 외면해버렸다. 한나가 감옥에서 녹음기를 받아 재생시키는 순간, 마이클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껐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들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다른 남자’는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를 감동 깊게 본 사람이라면 호감을 느낄 것으로 확신한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그런 것처럼 저자 슐링크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소통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접근했다.

    ‘다른 남자’는 모두 6편의 중·단편을 담고 있다. 196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는 ‘소녀와 도마뱀’은 하나의 예술작품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두 번째 작품 ‘외도’는 독일이 통일되고 동독과 서독이라는 이질적 집단이 하나가 돼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겪는 오해와 화해에 이르는 길을 다룬다. ‘청완두’는 사랑에 집중하다가 그 사랑이 지겨워질 때쯤 다른 사랑으로 도피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네 번째 작품 ‘아들’은 인생에서 자신의 일만 중요하게 여겨, 일 외에는 어떤 것도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미루고만 있다가 이혼한 한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유소의 여인’은 중년 부부가 자신의 내면에 잠든 상대에 대한 열정을 깨우기 위해 여행길에 오르는 이야기를 담았고, 끝으로 번역서의 표제작이기도 한 ‘다른 남자’는 얼마 전 세상을 뜬 아내 앞으로 온 편지에서 그녀의 숨겨둔 애인을 알게 된 한 남자의 기막힌 이야기다. ‘다른 남자’는 리처드 이어 감독이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번역서 표제작 ‘다른 남자’는 전혀 알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 운운하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 사로잡힌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시작한다. 그래서 그 ‘다른 남자’에게 아내인 척 답장을 쓰고, 급기야 그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렇게 해서 만난 아내의 옛 애인. 주인공은 그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아내의 죽음 이후에야 진정한 한 여인으로서 아내의 모습을 깨닫고, 나아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본다.

    “내 아내가 명랑한 여자였다고? 그는 질투심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자기가 아닌 그 남자와 있을 때 명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자기와 있을 때보다 그 남자와 있을 때 더 명랑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와 있을 때보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는 리자의 모습이란…. 그에게는 없는 기억이다. 그런데 그녀가 명랑한 여자였다고?”



    주인공은 현실에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이고, 그래서 언제나 “불만이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과거의 삶을 야금야금 파먹고 있었다.” 이에 비해 ‘다른 남자’는 사기꾼에다 허풍쟁이다. ‘다른 남자’는 모든 것을 미화해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로 유용성과 효율성, 적법성을 신조처럼 믿는 주인공과 모든 점에서 비교된다. 저자는 주인공과 ‘다른 남자’를 대조시키면서 일상에 내재한 삶의 허구성을 짚어내고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많은 평론가가 슐링크를 허구의 탈 뒤로 숨지 않고, 작가적 진실성으로 독자들 앞에 나서는 작가로 평가한다. 전후 독일의 도덕성 문제에 천착한 그는 전후 세대의 처지에서 윗세대가 왜 그런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는지를 밝히는 데 주력한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처럼 ‘다른 남자’ 역시 슐링크는 유대인과 독일인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나치 시절 집단적 침묵에 따른 정신적 문제 등을 역사나 사회 문제로 환원해 이야기하지 않고 개인들 간의 관계와 소통 문제로 본다.

    독일어 표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사랑의 도피’다. ‘사랑의 도피’는 ‘사랑으로부터의 도피’면서 동시에 ‘사랑으로의 도피’이기도 하리라. 여섯 작품의 주인공들은 사랑으로부터 도피하고, 사랑을 향해 도피한다. “어느 곳에나 있지만 아무 데도 없는 사랑. 때로는 구원이지만 때론 영혼을 옥죄는 감옥 같은 사랑.” 표지에 적힌 글귀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다.

    독서의 계절은 가을이라지만, 화창한 봄날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책 속에 풍덩 빠져보는 재미도 즐겁다. 뉴욕타임스 선정 ‘주목할 만한 도서’,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57주 연속 베스트셀러, 20여 개 국어로 번역 출간된 ‘다른 남자’를 꽃에 파묻혀 읽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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