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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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에서 타자로…거포들의 공통점

이승엽, 이호준, 이대호, 나성범, 채태인 ‘3년의 법칙’ 입증

  • 이경호 스포츠동아 기자 rushlkh@naver.com

    입력2015-06-22 13: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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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수에서 타자로…거포들의 공통점

    포수였던 김재윤은 조범현 kt 감독의 결단으로 마스크를 벗고 마운드에 올라갔다. 김재윤은 6월 17일까지 1군에서 17이닝 동안 23개 삼진, 방어율 2.23을 기록하며 kt의 확실한 필승 불펜 투수로 자리 잡았다.

    시속 140~150km 빠른 공을 그것도 포수 미트로 정확히, 한 번에 100개 이상 지속적으로 던질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특별하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 가능한 영역이다. 고교와 대학을 졸업하는 각 팀 3~4번 타자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프로의 벽은 높다. 하지만 팀의 2번째, 혹은 3번째는 아니지만 완성되지 않은 강한 어깨만 가졌어도 ‘가능성 있는 투수’로 선택돼 프로 유니폼을 입는 데 성공하곤 한다.

    그렇게 투수로 프로에 입단했다 타자로 변신해 큰 성공을 거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투수로서는 프로에서 성공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냉철한 진단, 혹은 부상으로 타자로 변신한 경우가 있고 투수를 하면 스타, 타자를 하면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결단도 있었다. 올해 프로야구는 우리 나이로 마흔인 이승엽(삼성)의 400홈런 달성, 그리고 역시 마흔의 나이로 300홈런에 다가선(6월 17일 현재 299개) 이호준(NC)의 도전이 뜨겁다.

    투수 출신 타자가 유리한 점

    이승엽은 고교 시절 경북고 에이스로 청소년국가대표에서 타자와 투수 양쪽 모두에서 맹활약했다. 워낙 희귀한 좌완 투수였고 1995년 프로 데뷔 당시 삼성은 마운드가 약했다. 팀의 미래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지만 팔꿈치 부상으로 타자로 변신한다. 이승엽은 “팔이 나을 때까지만 타자를 해보자고 했던 게 지금까지 왔다. 돌이켜보면 최고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이호준은 부상 없이 타자로 변신한 경우다. 생일이 빨라 이승엽보다 한 해 앞선 1994년 해태에 입단한 그는 당시 미래의 에이스 후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광주제일고 시절 팀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활약해 ‘제2의 선동열이 될 수 있는 특급 유망주’로도 불렸다. 연세대와 해태의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속에서 프로에 입단한 이호준은 그해 8경기에서 16안타 7홈런 8볼넷(4삼진)을 허용하며 부진했다. 열아홉 살 투수에게 프로의 벽은 높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타자로 변신했고, 그 결과가 300홈런 타자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승엽과 이호준의 장기는 수 싸움이다.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은 두 선수에 대해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지 예측하고 스윙하는 대가들”이라고 표현했다. 현장에서 ‘게스히팅’으로 표현되는 노림수는 이호준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승엽과 이호준이 타석에 서면 상대 포수는 온갖 변칙적인 공 배합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감각적인 눈썰미에 수 싸움, 그리고 경험까지 더해진 타자들이 한 수 위인 경우가 많다.

    연세대 좌완 에이스였던 나성범(26·NC)을 타자로 변신시킨 주인공인 김경문 NC 감독은 “투수 출신 타자에게는 분명 유리한 점이 있다. 마운드에 서서 수없이 많은 시간을 타자와 승부를 벌여왔기 때문에 역으로 투수의 마음을 잘 안다. 습성과 호흡, 버릇 등도 빨리 파악한다. 그래서 투수 출신 타자가 노림수에 능하다”고 설명했다. 이호준은 “사실 내가 저 투수라면 지금 이 공을 던지겠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들어서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꽤 많다”고 귀띔했다.

    일본 소프트뱅크에서 활약하는 이대호(33)는 경남고 시절 역시 4번 타자와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라이벌이 부산고 추신수(텍사스)였는데 역시 4번 타자이자 에이스였다.

    이대호는 2001년 롯데에 2차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입단했다. 194cm 거구가 매우 인상적인 신인 투수였다. 그러나 구속이 기대만큼 빠르지 않았다.

    당시 롯데 코치였던 이종운 현 롯데 감독은 “투구 폼이 정말 예뻤다. 아직 구속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코칭스태프가 고민을 많이 했는데 타격 연습을 시켜보니 타격 폼은 투구 때보다 훨씬 더 예뻤다. 어떻게 저렇게 큰 몸에서 이처럼 부드러운 스윙이 나올까 모두 놀라워했다”며 타자 변신 결정의 순간을 기억했다. 투수로서 재능은 프로 수준에서 평범했지만 타격에서 높은 자질을 발견한 것. 이대호는 2013년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롯데에 225홈런과 809타점을 안겼다.

    2012년 초 이뤄진 나성범의 투수에서 타자로 전환은 3년이 지난 지금도 결정적인 신의 한 수로 꼽힌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주목하던 좌완 강속구 투수에게 방망이를 건네며 김경문 감독은 “투수를 하면 8승10패 정도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타자 나성범은 30홈런을 칠 수 있는 재목”이라고 말했다. 나성범은 2014년 타자 변신 3년 만에 1군에서 30홈런을 때렸다.

    이승엽과 이대호, 나성범, 그리고 투수로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했다 타자로 변신해 성공한 또 다른 주인공 채태인(삼성)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 모두 마운드에서 내려와 방망이를 잡은 지 3년 만에 리그 정상급 타자로 올라섰다는 것.

    투수에서 타자로…거포들의 공통점

    이승엽, 이호준, 이대호, 나성범, 채태인 선수는 모두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해 큰 성공을 거둔 사례다(왼쪽부터).

    포수 출신 김재윤 투수 변신

    이승엽은 1995년 121경기에서 타율 0.285, 13홈런, 96년 122경기에서 타율 0.303, 9홈런을 날렸다. 그러다 3년째인 97년 타율 0.329에 32홈런을 때리며 리그 최고 타자가 됐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롯데 1군 멤버로 뛰기 시작한 이대호 역시 3년째인 2004년 처음으로 20개 이상 홈런(26개)을 치며 거포 반열에 올랐다. 2007년 데뷔한 채태인 역시 3년째인 2009년 타율 0.293에 17홈런을 기록하며 정상급 타자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경남고 2학년 때 청룡기 고교야구 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삼진 16개를 잡아내 야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하준호(26·kt)는 내년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한 지 3년째를 맞는다. 현장에서는 이미 미래의 타격왕 후보라는 평가가 나온다. 투수 출신 타자들의 큰 성공은 계보로 이어질 정도다.

    그러나 야수에서 투수로의 변신은 아직 뚜렷한 성공 사례가 없다. 현역 시절 최고 좌완 거포였지만 강한 어깨를 눈여겨본 코칭스태프의 권유로 투수로 변신했던 심재학 넥센 코치는 “투수와 외야수가 쓰는 근육 자체가 달랐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아팠다”고 기억했다. 아마추어 시절 최고 투수들조차 1군 엔트리 경쟁에서 탈락하는 프로무대에서 타자의 투수 변신 자체를 무모한 도전이라고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재윤(25·kt)의 도전은 큰 의미가 있다. 포수였던 김재윤은 1월 중순 조범현 kt 감독의 결단으로 마스크를 벗고 마운드에 올라갔다. 단 5개월여의 투수 수업, 그러나 시속 150km의 빠른 강속구에 낙차 큰 슬라이더와 스플리터까지 완성하며 코칭스태프를 놀라게 했다. 6월 17일까지 1군에서 17이닝 동안 23개 삼진을 잡으며 방어율 2.23을 기록하고 있는 김재윤은 kt의 확실한 필승 불펜 투수로 자리 잡았다. 야수도 대부분 시속 140km대 공을 던질 수 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변화구 컨트롤을 완성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조범현 감독은 “포수였기 때문에 자기 공을 받는 포수, 그리고 타석에 있는 타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던진다”고 말했다. 김재윤 스스로도 “포수로 뛰어봤기 때문에 포수의 결정을 100% 신뢰한다. 무조건 믿고 던진다. 그 점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타석에서 마운드까지 거리는 18.44m다. 매우 가까워 보이지만 투수에서 타자로, 타자에서 투수로 역할을 바꾸기 위해 그들이 오간 18.44m는 인생을 건 모험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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