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누타 산귀도 와이너리 전경(왼쪽)과 사시카이아 와인이 숙성되는 배럴 홀.
이탈리아 와인은 최상급인 DOCG부터 DOC, IGT, Vino da Tavola 순으로 등급별 제조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최하 등급인 Vino da Tavola를 받게 된다. 등급이 가격을 좌우하다 보니 와인 맛이 떨어져도 백포도를 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와이너리들은 산지오베제로만 만들거나 백포도 대신 보르도 레드 품종을 섞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악습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와이너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화선이 된 건 사시카이아(Sassicaia)였다. 사시카이아는 토스카나 볼게리(Bolgheri) 지방의 테누타 산귀도(Tenuta San Guido)가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으로, 원래 소유주가 개인적으로 먹으려고 만들었다. 보르도 품종으로 만들어 최하 등급인 Vino da Tavola를 받았지만 1971년 시험 삼아 시장에 조금 풀어본 것이 대히트를 하며 순식간에 명품 와인 대열에 올랐다.
등급보다 품질이 먹힌다는 점에 힘을 얻어 이번에는 키안티 터줏대감인 안티노리(Antinori)가 나섰다. 안티노리는 산지오베제에 백포도 대신 카베르네 소비뇽을 섞은 티냐넬로(Tignanello)를 내놓았다. 이 와인 역시 등급은 Vino da Tavola였지만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토스카나에서 보르도 품종으로 만든 명품 와인 슈퍼 투스칸(Super Tuscan)은 이렇게 악습을 깨며 탄생했다.
슈퍼 투스칸 인기가 키안티 와인의 명성을 넘어설 지경이 되자 이탈리아 정부는 결국 규정 수정에 착수했다. 슈퍼 투스칸 와인에는 볼게리DOC와 토스카나IGT라는 새로운 등급과 규정이 주어졌다. 그리고 키안티 와인에는 품질 저하의 주범인 백포도 대신 보르도 품종을 섞을 수 있도록 규정을 수정했다. 티냐넬로에는 이제 키안티DOCG라는 최고 등급을 붙일 수 있지만 등급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안티노리는 지금도 티냐넬로를 토스카나IGT 등급으로 판매하고 있다.
티냐넬로 와인, 오르넬라이아 와인, 슈퍼 투스칸의 원조 사시 카이아 와인(왼쪽부터).
갈고닦지 않은 전통은 악습이 된다. 그리고 그 악습을 깨는 데는 손해를 무릅쓴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가 없었다면 키안티 와인은 지금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테고 슈퍼 투스칸이란 명품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시카이아, 솔라이아, 오르넬라이아는 이미 명품 반열에 올라 가격이 높지만, 볼게리DOC나 토스카나IGT로 판매되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좋은 슈퍼 투스칸이 얼마든지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좋아한다면 슈퍼 투스칸을 음미해보는 건 어떨까. 보르도나 나파밸리와는 또 다른, 아펜니노 산맥과 지중해가 주는 토스카나의 정열적인 테루아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