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중간 유통 상인만 탓할 수는 없다. 농산물을 저장, 포장, 운송하고 판매처를 찾는 과정에서 실제 많은 비용이 발생하는 데다 농산물의 ‘지연 출하’ 또는 ‘홍수 출하’는 담합만 하지 않는다면 불법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형마트가 이들 유통단계를 총괄해 대행하지만 농민과 소비자는 여전히 농산물 가격에 불만이 많다. 그들이 가져가는 유통 마진이 너무 큰 탓이다.
유통단계 대폭 축소
농산물 유통단계 축소와 가격 안정을 위한 농협의 공적기능 강화는 역대 정권의 공약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농업 유통혁신 핵심 공약 중 하나도 그것이다. 꿈같은 얘기지만 농협이 산지 농산물을 적정 가격에 전량 구매하고 판매처를 찾아주며 개별적으로 저장, 포장해 운송까지 해줄 수 있다면 농산물 가격에 대한 농민과 소비자의 불만은 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량 저장과 ‘적기(適期) 출하’로 여하한 천재지변 상황에서도 농산물 폭등과 폭락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평택-음성 간 고속도로 남안성IC 인근에 위치한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안성물류센터)는 농산물의 유통단계 축소와 가격 안정이라는 희망을 현실화하는 우리나라 농산물 유통혁신의 메카다. 산지(농협 APC(산지유통센터) 포함)에서 농산물 원물(原物)을 사온 후 판매처를 찾아 정확하게 분류, 배송하는 것은 기본. 일반 마트나 소매점에서 바로 판매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씻어 단위별로 소포장도 해주며 물량이 쏟아지는 품목에 대해선 냉장 저장도 해준다. 이 모든 과정이 ‘세계 최강 IT(정보기술) 국가’ 명성에 걸맞게 자동화돼 있다. 그야말로 농민은 생산만 하면 농협이 알아서 판매해주는 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로 들어온 농산물 원물의 입고에서 출고까지 과정. 독을 통해 들어온 원물은 전동 팰릿 트럭을 통해(①) 분류장(②)으로 옮겨져 전자동으로 분류된다(③). 2층에선 전처리(다듬기와 세척) 작업(④)이 이뤄지고 소포장 작업을 하게 된다(⑤, ⑥). 3층에는 냉장, 냉동 저장고가 있다(⑦). 분류와 처리를 마친 상품은 독을 통해 화물차에 실린다(⑧).
유통비가 줄어드니 산지 농민에겐 농산물 수취가격을 높여줄 수 있고 소비자는 더 저렴한 가격에 신선한 농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된 셈이다. 또한 물류센터가 판매처를 해결해주니 농민 처지에선 안정적인 판로 확보가 가능하게 됐고, 물류센터의 적기 저장, 적기 출하 등 농산물 수급 조절 기능을 통해 물가를 안정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안성물류센터의 취급 가능 농산물 물량은 연 107만t으로 2조 원대 농산물 물량의 분산을 담당하고 있다. 전 과정이 운송관리 시스템과 창고관리 시스템 등에 의해 전산으로 자동 통제된다.
실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조사결과 안성물류센터 건립으로 연 800억 원의 사회적 편익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때 사회적 편익이란 생산자가 얻게 될 농산물 수취가격의 이득과 좀 더 낮은 가격으로 농산물을 구매함으로써 소비자가 얻게 될 이익의 합이다. (사)농식품신유통연구원은 도매시장 같은 기존 유통경로보다 안성물류센터를 통한 농산물 유통으로 농가 수취가격이 8.4%p 오르고, 소비자 구매가격은 6.2%p 떨어져 전체적으로 14.6%p의 유통비 절감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농협중앙회 측이 예상하는 올해 안성물류센터의 사업목표 1조2000억 원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연간 약 1700억 원의 유통비 절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당초 KDI가 추정한 사회적 편익 800억 원보다 2배 이상 큰 금액이다.
안성물류센터 오용구 부장은 “산지농협의 경우 생산과 마케팅을 병행하던 사업구조에서 연 2조 원의 농산물을 안성물류센터가 책임지고 팔아주는 사업체계로 전환한 뒤 생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곳에서 포장과 세척 작업까지 해주니 포장비가 절감되고 다수 거래처로 배송하던 물량을 안성에서 통합 입고함으로써 물류비 등이 절감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트럭 86대가 동시 접안
6월 16일 밤, 국내 농산물 유통혁신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려고 안성물류센터를 직접 찾아갔다. 안성물류센터의 첫인상은 커도 너무 크다는 느낌에 도시적 세련미가 더해졌다. 끝도 없이 펼쳐진 독(dock·화물차와 집배송장을 연결하는 설비)이 뿜어내는 조명은 한 장의 예술작품을 연상케 했다.
흔히 선박이 머무는 공간을 일컫는 독이라는 용어가 농산물물류센터에 쓰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은 화물차 짐칸과 정확하게 맞물릴 수 있게 만들어진 일종의 문으로, 화물차가 들어오면 문이 열리면서 전동 팰릿트럭(EPT)이 짐칸으로 들어가 농산물을 싣고 나오거나 부릴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선 화물차가 짐을 싣고 부리기 위해 독에 차를 가져다대는 행위를 선박 용어인 ‘접안’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현재 안성물류센터에는 5t과 11t 트럭 86대가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독이 만들어져 있다.
화물차에 냉장 저장된 농산물은 이 독 덕분에 단 1초도 더운 공기와 맞닿지 않고 1층 집배송장 안으로 옮겨진다. 입고장 독을 통해 화물차에서 1층 집배송장 안으로 들어온 농산물 원물은 물류자동 시스템과 창고 자동관리 시스템, 자동분류 시스템에 의해 분류돼 EPT에 의해 반대편에 있는 출고장 독으로 옮겨져 화물차에 실린다. 입고와 분류, 출고 전 과정에 사람 손으로 옮기는 모습은 없고 EPT만 넓디넓은 창고 안을 쌩쌩 달렸다. EPT는 말만 트럭이지 전기로 움직이는 친환경 지게차라고 보면 된다. 그 넓은 창고가 점퍼를 입지 않으면 추위를 느낄 정도인 10도에서 15도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2층에는 일반 농산물과 친환경 농산물을 소포장하는 소포장센터, 소비자가 바로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다듬기와 세척을 하는 전처리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소포장센터는 소량 다품목 생산설비를 갖추고 소비자의 다양한 취향에 꼭 맞는 상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모든 설비를 갖췄는데 약 1만3500㎡(4100평) 넓이에 자동, 반자동, 수동 작업을 할 수 있는 17개 라인이 깔려 있다. 1일 생산능력만 20만 팩에 달한다.
농협안성농식품물류센터 2층 소포장센터의 컨베이어 벨트. 작업을 마치면 자동으로 빈 박스가 와 쌓인다.
약 4300㎡(1300평) 넓이에 10개 라인이 있는 전처리센터는 농산물 원물을 상수도로 세척하고 최종적으로 오존수 살균작업을 해 포장을 뜯은 뒤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만드는 곳이다. 1일 생산능력은 46t에 달하며 연간 1만7000여t의 전처리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 작업자는 입실 전 반드시 에어샤워실을 통과해야 하며 전 구간에서 위생관리가 철저히 이뤄지고 있었다.
안성물류센터 한상훈 팀장은 “대형 유통업체의 물류센터는 단순하게 농산물을 자체 매장에 분산하는 통과형 물류센터지만, 안성물류센터는 소포장과 전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학교, 군대, 슈퍼마켓, 식품업체 등 다양한 수요처에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다목적 물류센터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안성물류센터 3층에 올라가면 또 하나의 장관이 펼쳐진다. 총 24개의 대형 저온저장고가 바로 그것.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냉동 저장고 4개는 안으로 들어가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춥다. 나머지는 농산물을 단기간 최적 상태로 보관하는 냉장 저장고다. 적정 온도는 자동제어 시스템이 관리하는데, 동시 보관이 가능한 물량이 840t에 달한다. 저온저장고 인근에 자리 잡은 식품안전센터는 최첨단 검사 장비를 갖추고 안성물류센터에 입고되는 농산물을 대상으로 잔류농약 정밀 검사와 미생물 검사를 하고 있었다.
한편, 농협중앙회는 안성물류센터의 성공적 운영을 바탕으로 경남 밀양시(연면적 1만2682㎡·2015년 완공)와 강원 횡성군(2270㎡·2016년 완공), 전남 장성군(6640㎡·2017년 완공), 제주(2810㎡·2017년 완공)에 권역별 농산물물류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다. 농협중앙회는 이 물류센터들을 통해 2020년까지 3조 원의 농산물을 유통함으로써 농업인은 판매 걱정 없이 생산에만 집중하고, 농협은 책임지고 팔아주는 ‘판매 농협’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