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47차 중앙통합방위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남재준 국정원장(오른쪽)과 김관진 국방부 장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의혹 파문으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놓였다. 지난 1년간 국가정보원(국정원)은 대통령선거 인터넷 댓글 개입 의혹, 남북정상회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 아들설 뒷조사 의혹 등 정치 공방 이슈의 한복판에 섰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셀프 개혁’을 주문하며 신뢰를 보냈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국정원과 검찰의 주먹구구식 수사, 국정원 직원의 문서 조작 관여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남재준 원장 경질과 대대적 인적 쇄신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3월 1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12일 최고중진연속회의에서 각각 “검찰 수사 결과를 보고 책임을 논해야 한다”며 사전문책론에 대해 선을 그었지만 남 원장 경질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높아지고 있다.
여권 내 남재준 경질 기류 확산
최고중진연속회의에 참석한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회의 직후 남 원장에 대해 “민주주의 가치를 심대하게 훼손한 장본인이자 여야 간 정치적 갈등의 핵심”이라며 “정치적 싸움의 원인만 제공해놓고 어떻게 국정원장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느냐”고 정면 비판했다. 앞서 김용태 새누리당 의원도 CBS 라디오에 출연해 “국정원장이 스스로 판단해 대통령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결정하길 바란다”며 사퇴를 압박했다. “국정원이 보여준 일탈과 무능이 심각하다”(심재철 새누리당 의원), “명백히 조사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정병국 새누리당 의원)는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민주당은 남 원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높인다.
박 대통령과 황 대표의 제지에도 여권 내 반발 기류가 확산하는 데는 6·4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국정원발(發) 민심 이반’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3~5% 차로 승부가 갈리는 수도권 선거를 감안하면 민심이 악화하는 것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게 이유다. 김용태 의원이 “선거를 앞둔 사람으로서 살이 부들부들 떨린다”고 말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지도부 뜻과 달리 새누리당 내에서 남 원장 조기 사퇴를 주장하는 이재오(서울 은평을), 심재철(경기 안양동안을), 김용태(서울 양천을), 정병국(경기 여주·양평·가평), 정몽준(서울 동작을) 의원의 지역구는 모두 수도권이다. 여당 중진의원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역구가 수도권이냐 영남이냐에 따라 이번 사건을 보는 시각차가 큰 게 사실이다. 국정원 출신 이철우(경북 김천), 검사 출신 김진태(강원 춘천) 의원은 무죄추정원칙을 들어 남 원장과 국정원을 두둔하지만, 수도권 의원들은 (남 원장 경질) 타이밍을 놓치면 당장 40대 민심이 돌아선다며 펄쩍 뛴다. 지금은 비주류 의원이 목소리를 내지만, 친박(친박근혜) 수도권 의원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40대가 등을 돌리기 전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을 토로한다. 이런 목소리가 커지면 당에서도 청와대에 전달할 거다. 박 대통령도 이번 사건이 6·4 지방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면 경질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대통령이 나서기 전 남 원장이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도 있고….”
오히려 보수표 결집 기회?
3월 13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 촉구 1인 시위를 하는 박근용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6·4 지방선거에서 야권의 정권심판론이나 여권의 지방정부심판론은 결국 김한길·안철수 대 박근혜 싸움이다. 승부욕이 강한 ‘선거의 여왕’이 가만 보고만 있겠나. 민주당 소속 시도지사가 많아 현 정부의 국정철학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만큼 박 대통령은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수도권 3석을 모두 이겨야 제대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감치 인천시장 후보로 나선 이학재 의원 지지율이 뜨지 않자, 일 잘하던 유정복 의원을 (안전행정부 장관 자리에서) 차출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물론 박 대통령이 2007년 당내 경선 때부터 함께한 남 원장을 여전히 신뢰하지만, 자신의 최대 지상과제인 지방선거 승리에 걸림돌이 된다면 언제든 경질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남 원장의 정치 목숨도 민심에 달린 거다. 다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남 원장 후임 인선에 혼선을 빚거나, 후임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이 선거를 겨냥해 총공세에 나서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남 원장 경질 시기는 최소한 후임 인사 선정 뒤에나 가능하지 않겠나.”
물론 이번 사건이 3개월도 남지 않은 6·4 지방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선 개입 의혹 사건, NLL 대화록 공개 등 지난해 논란 중심에 섰던 국정원이 또다시 증거 조작 의혹에 휘말린 만큼 새누리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관측이 많다. 즉 명확한 팩트(사실)에 근거한 논란이어서 박 대통령 지지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새누리당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특히 이번 일은 현 정부에서 발생한 사건이고, 새로 창당하는 통합신당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야권 총공세가 예고되는 상황.
‘남재준 인책론’을 제기한 정몽준, 이재오 의원이 3월 12일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얘기하고 있다(왼쪽). 3월 9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 조작 논란에 대해 기자회견을 한 안철수 새정치연합 중앙운영위원장과 김한길 민주당 대표.
“이 문제가 단순히 증거 조작 논란에 그치면 야당에 유리하다. 야권은 이 문제를 야권 지지층, 여당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층을 결집하는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여권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번 사건이 안보를 놓고 여야가 싸우는 모양새로 비화하면 그것이 곧 역풍으로 작용하는 경계선이 될 것이다. 야당 공세가 안보 프레임을 약화하는 것으로 비춰지면 보수 진영이 결집할 수 있다는 얘기다.”
보수층은 이미 결집할 대로 결집했기 때문에 세대 간 대결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40대가 어떤 식으로 여론을 형성할지를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새누리당 수도권 의원들이 ‘남 원장 퇴진’으로 조기 진화 필요성을 강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40대는 현 정부의 국정운영에 공감을 표시해왔고, 야당이 북한에 우호적이거나 민생을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면서도 “이번 사건의 경우 명확한 팩트가 있고, 지방선거에서는 민생 이슈 못지않게 정쟁 이슈가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흐름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수도권 광역단체 후보들 역시 국정원 이슈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수도권 광역단체장 후보 선거캠프 관계자의 말이다.
“현재 ‘선거 공중전’을 하는 상황이고, 우리 지역에서도 이 사건을 놓고 대학 밀집지역과 도농 복합지역 주민의 의견이 엇갈려 현재로선 지켜보고 있다. 이번 사건이 대형 선거 이슈가 되려면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통합신당은 이 고리를 만들고 선거 이슈로 부각하려 하지만, 간첩사건 증거 조작 의혹이 ‘나와 무슨 관계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오히려 김한길·안철수 리더십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연일 검찰발(發) 새로운 소식이 나오고 신문에서 보통 2, 3개 지면을 할애해 보도해 갑갑한 건 사실이다. 민심이 나빠지면 당연히 남 원장 경질을 요구할 테고, 당과 청와대도 무시할 수 없을 거다.”
그의 말처럼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중앙운영위원장 처지에선 통합신당 공동대표로서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리더십을 검증받는 첫 시험대가 될 공산이 크다. 김 대표는 지난해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장외투쟁에 나섰다가 빈손으로 국회에 복귀한 아픔이 있다. 당시 국회 복귀를 위해 ‘남해박사(남재준 원장 해임과 박 대통령 사과)’를 출구전략으로 내세웠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후 ‘무기력한 야당’이라는 비판에 시달리면서 민주당 지지율은 급전직하했고, 결국 ‘안철수 신당’에 주도권을 내줬다. 따라서 이번에는 최소한 남 원장 사퇴는 이끌어내야 야권 지지층 민심을 통합신당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한길·안철수 공동 리더십 시험대
안철수 위원장 역시 지난해와는 위상이 달라졌다. 통합신당 공동대표로서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면서 정치적 자산도 쌓아야 할 때인 만큼 이 문제를 어떻게 끌고 갈지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민주당 주변에선 과거 장외투쟁 방식보다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이 “남 원장은 해임하는 게 마땅하다”는 식의 ‘점잖은 대응’이 오히려 ‘먹혀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해 국정원 댓글 사건 때는 야당이 장외투쟁을 벌이며 격하게 공격했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남 원장은 책임지고 물러나고 특검을 통해 엄정히 수사하자’고 점잖게 나오니까 국민이 더 호응하는 것 같다. 박 대통령 지지율이 높고 임기 초반인 만큼 ‘세게’ 나가는 것보다 이렇게 ‘생각해볼 문제’로 만드는 게 지금은 낫다. 향후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같은 국정원 개혁 드라이브를 다시 걸지, 남 원장 해임 건의로 끝낼지는 여론을 보고 결정할 문제다. 선거를 앞두고 자칫 세게 나갔다가 또 역풍을 맞을 순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