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탄 중부의 요새인 파로종에서 본 파로 시가지 전경.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솔티호텔을 나선다. 카트만두를 떠나려고 공항으로 나서는 길이다. 기념으로 정원에서 사진을 찍는다. 때마침 극락조나무에 황색 꽃이 피어 있다. 피어난 꽃잎 모습이 새 형상이다. 그래서 극락조꽃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상서로운 일과 마주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부탄을 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로 들어가든지, 인도 북부지역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입국하는 방법이다. 나와 지인들은 시간을 절약하려고 비행기를 타기로 합의했다. 공항은 숙소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이제는 하리 씨와 작별할 시간이다. 나는 명함을 주고받으며 나중에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e메일로 연락하자고 약속해둔다.
이윽고 꼬리에 용이 그려진 드루크 항공(Druk Air)을 탄다. 드루크 항공은 부탄 국영비행기다. 남녀 승무원들이 부탄 전통의상 고우(Gou)를 입고 있다. 모두 몽골리안으로 네팔 사람보다 정겹다. 부탄을 ‘용의 나라’라고 하는데, 내 가 용띠여서인지 전생의 내 나라에 가는 듯한 느낌이다. 소박한 얼굴의 승무원들만 봤는데도 왠지 낯익은 기시감(旣視感)이 든다.
부탄 국민 97% “나는 행복하다”
국제사회에서 국민총생산(GNP) 기준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34위일 때 부탄은 112위였다. 국민 1인당 생산량으로만 볼 때는 최빈국이다. 그러나 영국 레스터대에서 국가별 행복도를 조사했을 때 부탄은 세계 8위를 차지했다. 1, 2위는 덴마크와 스위스, 미국은 23위였고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102위였다. 국민 행복도를 계량화한 수치가 얼마나 객관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순위는 더 밀려났으면 밀려났지 앞으로 당겨지지는 않을 성싶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2년 자살한 사람이 10만 명 중 33.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였으니 할 말이 없다. 올해도, 내년도 보나마나 비슷할 결과일 테니 끔찍하지 않은가. 입만 열면 복지를 얘기하는 정치지도자들의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부탄에는 자살자와 노숙자, 우울증 환자와 거지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사람이 사는 땅이니 소수라도 있겠지만 아주 미미해 유의미한 숫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부탄 국민 97%가 행복하다고 말하니 실제로 국가별 행복도는 1위가 아닐까 싶다.
부탄은 4대 국왕이던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Jigme Singye Wangchuck) 때부터 생산량을 중시하는 GNP를 버리고 그 대안으로 GNH(Gross National Happiness·국민총행복도)를 추구했다고 한다. 그는 GNP가 물질적 탐욕을 조장해 빈부격차를 심화할 뿐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황폐화한다고 보고 GNH를 제시했는데, 현재 5대 국왕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Jigme Khesar Namgyel Wangchuck)는 그것을 실현하려고 네 가지 기본 정책을 편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지속가능하고 공평한 사회경제 발전과 생태계 보전 및 회복, 그리고 부탄의 전통과 정체성을 실현하는 문화의 보전과 증진, 이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좋은 협치(協治)가 그것이라는 기사였다.
탑승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비행기는 부탄 국제공항인 파로(Paro) 공항에 착륙하고 있다. 협곡을 비집고 들어선 공항 활주로는 우리나라 자동차 전용도로 규모고, 공항청사도 우리나라 읍 시외버스터미널 수준이다.
그럼에도 공항은 작은 궁전 같다. 역대 국왕들과 5대 국왕 부부 사진이 걸려 있고, 광고판에 인쇄된 GNH가 선명하다. GNH 밑에는 국민의 총체적인 행복과 후생수준을 구성하는 규범적인 9개 영역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있다. 그 9개 영역은 △심리적 웰빙 △건강 △교육 △시간 활용 및 균형 △공동체 활력 △전통과 문화의 다양성 △생태 다양성 및 복원력 △생활수준 △좋은 협치 등이다. 부탄은 또 국민총행복지표 72개를 개발해 2008년부터 2년마다 국민총행복지수를 조사 발표하고 있다고 한다.
부탄 땅을 밟는 순간 왠지 나 자신도 행복해질 것만 같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인 가운데 누군가가 부탄에 와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인구 80여만 명의 부탄은 국토가 비좁아 이민이나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부탄 여자와 결혼하면 영주권이 주어진다는데, 50대를 넘어선 나와 지인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
관광객 제한 문화·정체성 지키기
파로종 내부 사원 공간(위)과 국왕 사진이 걸린 파로 공항청사.
친리 씨의 안내를 받은 첫 방문지는 17세기 때 건립한 파로종(Paro Dzong). ‘종’이란 부탄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데 우리식으로 말하면 행정청사다. 그러나 단순히 행정 수장만 있는 청사가 아니라, 고승이 거주하는 불교사원과 사법부가 함께 있는 부탄만의 독특한 복합 청사다. 종 내부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행정과 사법공간은 일반인 출입이 자유롭고, 수행자들의 수행공간은 관광객 출입을 제한한다.
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요새 기능이다. 티베트의 침략에 대비해 망루처럼 높은 곳에 건설해 적의 침투를 감시했던 것이다. 파로종 역시 멀리서 보니 요새 같다. 성벽은 흰색 칠을 했다. 청사와 사원은 전통가옥 형태로 마치 일본 오사카성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파로종뿐 아니라 부탄의 모든 종은 히말라야에 사는 요기를 제압하려고 건립했다는데, 사실 요기는 침략자를 상징하는 것 같다.
파로종에 올라보니 산들에 둘러싸인 파로 시가지가 한눈에 든다.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파추 강물이 옥처럼 투명하다. 사원과 흡사한 전통가옥 외형이 아름답다. 가옥만 봐도 부탄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문득 1960년대 무렵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우리 농촌의 전통 초가를 모두 슬레이트지붕으로 바꿔버린 것이 생각나 몹시 씁쓸하다. 지도자의 문화의식과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부탄에 와서 또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파로종 현관에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친리 씨가 흰색 가사를 착용한다. 종에 들어설 때는 남자라면 누구나 전통옷 위에 가사를 걸치는 것이 관습이란다. 가사 색깔은 신분을 나타내는데 국왕은 노란색, 법왕은 초록색, 승려는 주황색, 국회의원은 파란색, 보통 사람은 흰색이라고 설명한다.
목재와 흙으로 건립한 종 건물들은 화재에 취약하다. 실제로 파로종도 1905년 화재로 소실됐다 복원한 건물이다. 티베트불교처럼 붉은색 가사를 착용한 수행자들이 간간히 지나치지만 말 한 마디도 붙여보지 못하고 파로종을 나선다. 아직 부탄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뭘 좀 알아야 질문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친리 씨가 다음 행선지를 잡으려고 누군가와 통화한다. 그의 휴대전화에 나타난 젊은 국왕 부부 사진이 눈길을 끈다. 국왕 부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을 텐데 부럽다. 도대체 부탄 사람들에게 국왕은 어떤 존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