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선박에 근접해 확인하는 미 해군 초계기.
1962년 10월 16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몇 달 전부터 첩보 수준으로 떠돌던, 문제의 핵미사일 발사 기지 건설을 항공정찰을 통해 확인하고 이를 존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엿새 동안 극비 국가안보회의를 잇달아 연 끝에 10월 22일 워싱턴 시각 저녁 7시, 케네디가 TV카메라 앞에 섰다. 케네디는 그때까지 국민이 전혀 모르던 쿠바 상황을 설명하고 “당장 해상봉쇄에 들어간다”는 중대 발표를 했다. 당사자인 소련에게도 사전경고가 없던 ‘벼랑 끝’ 발표였다.
그다음 날부터 미국 학교와 직장은 민방공훈련에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교사 지시에 따라 책상 밑으로 숨고 팔로 머리를 감싸는, 실제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러운 실습을 했다.
미군에 비상이 걸린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비상은 처음 ‘데프콘(DEFCON) 3’ 단계에서 시작해 며칠 뒤에는 전쟁 직전에 발령되는 최고 단계인 데프콘 2로 격상됐다. 그와 동시에 핵탄두를 싣고 갈 대륙간 탄도미사일 145기가 발사대기에 들어갔고, 핵폭탄을 실을 중(重)폭격기 23대, 역시 핵폭탄을 장착할 요격기 161대가 출격 준비를 마쳤다.
이들 핵무기 목적지는 쿠바가 아닌 소련이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 한 발씩 투하된 원자탄이 두 도시를 초토화했던 점과 그 뒤로 핵무기 성능이 훨씬 강화된 점을 고려하면 이들 무기의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재래식 무기로 쿠바를 타격할 상황에 대비해 폭격기 1400대가 8개 조로 나뉘어 1개 조는 항시 공중에 떠 있는 이른바 ‘에어본’(airborne) 상태에 돌입했다.
피그스 만 사태로 위기 초래
유엔본부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오른쪽)을 배웅 중인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
소련은 이 사태를 앞세우며 카스트로를 설득해 문제의 핵미사일 발사 기지 건설에 들어갔다. 미국에 한참 뒤처진 핵전력 상황 때문에 압박을 느끼던 크렘린 당국은 이 기회에 미국에 인접한 곳에 핵을 배치하면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케네디의 대국민 발표 직전까지 미국 국가안보회의에서 논의된 대응 방안은 다양했는데 소련에 대한 외교적 압박, 전투기를 활용한 쿠바 내 문제의 기지 폭격, 미군 상륙을 통한 카스트로 정부 무너뜨리기 등이었다. 합참회의 쪽 사람들은 쿠바에 대한 전면 침공이 최선이라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반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번 사태를 모르는 척하고 그냥 넘어가자”는 안을 내놓았다. 그는 “핵폭탄 보유량이 미국은 5000개, 소련은 300개에 불과한 상황에서 쿠바에 핵미사일 몇십 기가 추가된다 해도 힘의 비례에는 변동이 없을 테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
대국민 발표 후 첫 나흘 동안 양국 정상 간 전보를 이용한 몇 차례 교신이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국 선박은 미국의 해상 봉쇄를 묵살할 것이라 밝혔고, 실제로 그사이 미사일과 관련한 소련 선박 수십 척이 봉쇄선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에서 매파 목소리가 커가고 일촉즉발 충돌위험이 높아질 무렵 소련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미국이 쿠바를 더는 침공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미국이 소련을 겨냥해 터키에 배치해놓았던 미사일을 철수할 경우 소련도 쿠바 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소련 전술 핵폭탄 100여 개 배치
쿠바 카스트로(중앙)와 소련 흐루쇼프(오른쪽).
10월 28일 흐루쇼프가 이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미국의 첫 국가안보회의 이후 13일간 이어진 드라마는 이렇게 일단락됐다. 사람들은 숨을 다시 내쉬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 사태를 망각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단락한 직후 가장 단순화된 평가는 “케네디의 배짱이 소련을 꺾었다”였다. 이는 세월이 지나면서 정론으로 굳어졌다. 미국의 다른 한 가지 양보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런 평가가 나올 만도 했다.
월터 도언 캐나다 군사대학 교수는 먼지 쌓인 문서보관소를 뒤진 끝에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해결 과정에서 케네디와 흐루쇼프 외에 또 한 명의 주역을 발굴해 최근 한 학술지에 발표했다. 당시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이 막판 며칠 간 눈부신 구실을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 대표부는 뉴욕 유엔본부 건물 38층에 각각 자리했다. “우 탄트가 두 방을 숨 가쁘게 오가며 중재한 끝에 타협이 이뤄졌다”고 도언 교수는 적고 있다. 한 번은 미국 대표가 심야에 우 탄트를 깨워, 미국이 최소한의 체면을 세울 수 있도록 소련 측을 설득해달라고 간청했다는 일화도 찾아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해 훨씬 뒤에 밝혀진 또 하나 섬뜩한 사실이 있다. 당시 쿠바에는 문제의 ‘전략’ 핵무기와는 별도로 ‘전술’ 핵폭탄 100여 개와 이를 운용할 소련군 병력도 주둔해 있었다는 것이다. 전략 핵무기란 대형 핵폭탄 혹은 이를 실어 나를 미사일을 말한다. 이는 실전에 사용하기보다 힘을 과시해 상대로 하여금 공격할 엄두를 못 내게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에 비해 소형인 전술 핵폭탄은 실전에서 사용할 것을 전제로 배치된다. 전략 핵무기는 군통수권자만이 발사명령을 내리지만 전술 핵폭탄은 일선 지휘관도 내릴 수 있다.
만약 미국이 쿠바를 상대로 군사행동에 들어갔더라면 쿠바 주둔 소련군이 방어를 위해 전술 핵무기를 썼을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는 생각하기조차 아찔한 상황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하버드대 안보전문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외교·안보 분야 전문잡지 ‘포린어페어스’ 최근호에서 “만약 당시 전면 핵전쟁으로 갔더라면 미국인 1억 명, 소련인 1억 명 이상이 희생됐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당시 케네디의 대응에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면 벼랑 끝 전술을 들고 나온 담력보다 강경론자의 큰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을 잘 잡은 점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같은 평가를 흐루쇼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 내에서 “왜 나약하게 물러섰느냐”는 비판을 받은 끝에 쿠바 미사일 위기 2년 뒤 실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