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홍보관에 ‘갤럭시S3’ 등을 홍보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내용은 이렇다. 배심원단은 삼성전자가 애플의 디자인특허를 최소 3가지 침해했다고 평결했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앞면 테두리와 아이콘, 앞면 검은색 처리 등에서 애플 디자인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또 바운스백(화면을 맨 아래까지 내리면 다시 튕겨져 화면 끝임을 알려주는 기능), 스크롤(손으로 빠르게 사진을 넘기는 기능), 멀티터치 줌(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 및 축소하는 기능), 내비게이션 특허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애플은 지난해 삼성전자가 자사의 모바일기기 디자인특허와 소프트웨어 기술특허를 침해해 25억∼27억5000만 달러의 손실을 봤다고 소송을 제기했으며, 삼성전자는 이에 맞서 애플이 자사의 무선통신특허를 위반했다며 4억2180만 달러의 특허 사용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애플이 무선통신특허를 침해했다는 삼성전자 측 주장에 대해서는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배심원은 애플이 삼성전자에 배상할 금액은 없다고 평결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애플은 이 기세를 몰아 디자인특허 침해 평결을 받은 삼성전자 제품 일부를 미국에서 팔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법에 냈다. 애플은 디자인특허 침해 평결을 받은 삼성전자 모델 28개 가운데 상대적으로 최신 모델 8개를 골라 판매금지를 신청했다. 해당 모델은 갤럭시S2(미국 통신회사 AT·T용), 갤럭시S2(T-모바일용), 갤럭시S2 스카이로켓, 갤럭시S2 에픽 4G, 갤럭시S 4G, 갤럭시S 쇼케이스, 갤럭시 프리베일, 드로이드 차지 등 8개다. 그리고 여기에 갤럭시탭10.1 LTE도 추가했다. 갤럭시S3와 갤럭시노트10.1 등 최신 제품은 빠졌다.
삼성전자와 애플은 세계 9개국에서 30개 특허를 놓고 싸우는 중이다. 일부는 1심 판결이 나왔지만, 그것도 제각각이다. 앞으로 있을 소송이 어떻게 전개될지,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세기의 특허 전쟁은 이제 서막을 알렸을 뿐이다.
소송 결말과 시간 예측 불허
삼성전자는 배심원 평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최종 판결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태세다. 먼저 배심원단이 평결을 내렸지만 양사의 특허소송 최종 판결은 재판장인 루시 고 판사가 직접 내리기 때문이다. 배심원 평결을 전달받은 고 판사는 이르면 한 달 내 공식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배심원 평결에 맞춰 판결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반대 결정을 내리거나 배상액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담당 판사에게 있다.
고 판사는 애플에 삼성전자 제품의 판매를 중단시키고 싶으면 8월 27일까지 판매금지 요청 등의 내용을 담은 요구서를 법원에 제출하라고 했다. 이에 애플은 스마트폰 8종 등을 판매금지 요청했다. 삼성전자는 답변서를 2주 안에 제출해야 한다.
고 판사는 9월 20일 최종 판결을 위한 심리를 재개하고, 그로부터 며칠 뒤 최종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평결을 뒤집을 근거가 새로 제시되면 배심원단의 평결 내용이 바뀔 수 있다. 스마트폰 블랙베리 제조업체인 캐나다 리서치인모션(RIM)이 지난달 소프트웨어 제조업체 엠포메이션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배심원 평결을 받았지만, 이후 담당 판사가 배심원들의 평결을 뒤집은 사례도 있다. 이와 반대로,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릴 때 추가로 징벌적 배상 명령을 하는 경우도 있다. 징벌적 배상액은 배심원단이 결정한 손해배상의 최대 3배까지다.
삼성전자는 이의신청을 하고도 패소한다면 항소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배심원 평결과 고 판사의 판결이 배치될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항소심에 기대를 걸기도 한다. 항소심에선 비전문가로 구성한 배심원단이 아니라, 전문 판사들이 심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항소법원으로 올라가면 심리하는 데 7개월가량 걸리고 최종 판결까지 1년에서 1년 6개월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항소법원은 특허권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적용되는지에 초점을 맞춰 판단한다. 물론 항소해도 판매금지 명령 등은 그대로 진행된다.
삼성전자가 항소 후 애플과 물밑 타결을 시도하는 것도 예상해볼 만하다. 이미 이재용 사장, 최지성 부회장 등 최고경영진이 애플 팀 쿡과 여러 차례 공식, 비공식적으로 만나 협상한 상황이라 상대의 요구 조건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삼성전자가 강경 전략으로 바꾸는 시나리오도 있다. 삼성은 부품 최대 고객인 애플을 다소 방어적으로 대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무선통신특허만 1만1500여 건을 보유하고 있다. 1000건 미만에 그치는 애플에 대공세로 전환하면 얼마든지 추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폰5에 롱텀에볼루션(LTE)을 채택하면 LTE 특허가 많은 삼성전자의 반격 카드는 더욱 많아진다.
8월 24일 한국 법원은 애플이 삼성전자의 무선통신특허 2건을 침해하고 삼성전자는 애플의 디자인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또 삼성전자의 무선통신특허를 침해한 애플의 아이폰3GS, 아이폰4, 아이패드1, 아이패드2도 각각 판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애플의 바운스백 특허를 침해한 것이 인정된다며 애플에 2500만 원을 배상하고 갤럭시S2, 갤럭시탭10.1 등 제품의 판매금지 및 폐기처분을 명령했다.
한국과 미국의 제도 차이
한국 법원의 판결은 배상액이 수천만 원 수준으로 미미하고 그 대상도 오래된 제품이어서 당장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무선통신특허 침해 2건을 인정받음으로써 특허소송을 제기할 경우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고지를 점했다. 한국에서의 판결은 사실상 삼성전자의 승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미국의 판결은 한국과 정반대인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제도 차이다. 한국과 미국 법원이 중시하는 기준도 다르다. 미국은 디자인특허를, 한국은 기술특허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게다가 디자인특허에 대한 이견도 존재한다. 한국 판사는 삼성전자와 애플 스마트폰이 디자인 유사점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디자인이 동일, 유사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미국은 어떤 인상이나 전체적 이미지를 지식재산권으로 인정한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 스마트폰 형태를 애플 고유 디자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비전문가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맞다, 그르다’에 대한 평가보다 ‘좋다, 나쁘다’에 치우쳐 평결을 내린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자국 기업인 애플에 편향된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도 지적됐다. 배심원단이 109쪽에 달하는 지침에 맞춰 20쪽 평결 양식을 작성해달라는 고 판사의 요청에도 단 22시간 만에 결론을 낸 것이나 배상액을 급하게 수정한 점 등은 지금도 도마 위에 오른다.
인터넷 법률 블로그 그록로(Groklaw)에는 이런 의견들이 잇따라 게시됐다. 마크 웨빈크 듀크대학 법대 교수는 “이런 점 등 때문에 배심원단의 평결을 지지할 수 없다”며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와 애플은 현재 한국을 포함한 세계 9개국에서 30여 건의 특허 관련 소송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1심 결과가 나온 국가도 있다. 네덜란드 법원은 6월 애플이 삼성전자의 무선통신특허 1건을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독일 법원은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 침해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으며, 영국에서는 삼성전자가 ‘디자인 비침해 확인소송’에서 승리했다.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에서는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8월 31일에는 일본 법원이 침해 여부를 가리는 중간 판결을 내놓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