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정추’의 외침이 쩌렁쩌렁했다. 선생은 한반도가 낳은 천재 음악가다. 광주 출신. 1946년 사회주의 혁명분위기가 고조하던 북한으로 건너갔다. 평양음대 교수를 맡았다. 차이코프스키음악스쿨에서 공부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 계보 4세대 제자로 불린다.
북한은 이 ‘음악 천재’를 버렸다. 김일성 독재에 반대했다는 게 이유다. 그는 1957년 카자흐스탄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해 지금껏 알마티에 산다(주간동아 792호 ‘박제가 된 천재 음악가 정추, 통일 조국 노래를 부르고 싶다’ 기사 참조).
그가 한국에 왔다. 최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마라.”
윤이상(1917~95)은 한국이 버린 ‘민족 음악가’. 1967년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은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한국에서 버림받은 후 북한식 사회주의의 미망(迷妄)에 빠졌다. 한국인을 포섭해 북한에 보낸 적도 있다.
정추와 윤이상의 족적은 정반대다. 1980년대 말 정추는 구국전선을 만들어 북한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노태우 정부가 도왔다. 윤이상은 북한에서 대접받았다. 윤이상 부인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고향은 남쪽 통영입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께서 그렇게 인덕으로 살펴주시고 모든 편리를 봐주셨고,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사랑도 컸습니다. 선생님이 한번은 저한테 수령님께서 꼭 형님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두 선생이 걸은 길이 안타까울 뿐이다. 두 분 모두 소싯적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역적으로 지탄받으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