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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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조선의 어머니’ 누구냐?

김옥 등 북한 로열패밀리 여인들 중 김정숙 잇는 후보 찾기 힘들어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1-08-29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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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조선의 어머니’ 누구냐?
    1990년 가을 어느 날 새벽 4시, 김용순(1934~2003년, 전 노동당 비서)이 연회장에 나타났다. 김정일(69·국방위원장)이 늦게 도착한 그에게 벌주를 권했다. 김용순이 코냑을 연거푸 들이켰다. 노동당 비서 10여 명이 모였다. 그해 9월 일본 자민당 가네마루 신(金丸信) 부총재의 방북이 성사된 것을 축하하는 파티. 북한은 일본의 경제 지원을 바랐다.

    김정일 옆자리에 김영숙(64)이 앉아 있었다. 김영숙은 김설송(37)과 김춘송(36)을 낳은 김정일의 정실(正室). 북한과 가네마루 신을 연결해준 재미교포 P씨도 헤드테이블에 앉았다. P씨는 김영숙을 대면한 몇 안 되는 북한 권부 밖 인사. 한국 언론은 김영숙을 둘째 부인으로 표현하곤 한다. P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한은 봉건적 가부장제가 강하게 남아 있다. 처(妻)와 첩(妾)을 엄격히 따진다. 김영숙이 살아 있는 한 김정일 부인은 김영숙 한 명이다. 북한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을 뿐 김정일이 부부동반 모임 때 김영숙을 대동하곤 했다.”

    김영숙은 어떻게 지낼까. P씨 경험대로라면 특정 시기까지 정실 노릇을 했거나 지금도 정실일 수 있다. 김영숙이 낳은 맏딸 김설송은 생모와 마찬가지로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다. 김설송의 남편은 누구일까. 김정일 맏사위의 아버지는? 김정은(29·3남)과 맏딸은 사이가 좋을까. 김정은과 김옥(47)의 관계는? 질문이 꼬리를 물지만 단정할 만큼의 로열패밀리 관련 팩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질문마저 안 할 까닭은 없다. 팩트가 부족하면 ‘틀’로 엿봐야 한다. ‘조선의 어머니’라는 틀로 북한을 들여다보자. 북한에서 조선의 어머니는 중요한 개념이다. 북한은 ‘김일성 민족’이라는 관념어를 만들어냈다. 조선의 어머니는 김일성 민족의 어머니다. 대남 사업 때 사용하는 ‘우리 민족끼리’에서의 민족도 김일성 민족을 가리키는 것. 조선의 어머니는 조선왕조의 왕후(王后) 개념이 아니라 혁명 지도자의 모친을 지칭한다.



    해외 방문 김옥 대동은 이례적인 일

    조선의 어머니, 그러니까 김일성 민족의 어머니는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 ‘어머니 조국’이라는 북한식 개념에서 조선의 어머니는 김정숙 말고 한 명 더 있다. 김정숙의 시어머니 강반석. 북한 역사는 김일성 생모 강반석을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혁명투사면서 위대한 수령을 낳아 키운 조선의 어머니”라고 가르친다.

    김정일이 중국(5월), 러시아(8월)를 방문할 때 김옥을 대동한 것은 이례적이다. 첩이 처가 된 걸까. 김옥이 조선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김정은이 알려진 대로 김정일의 첩 혹은 세 번째 부인 고영희의 아들이 아니라 김옥의 아들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김옥과 김정은의 나이 차(18세)를 고려할 때 무게감이 낮다. 일각에선 김옥이 김정은의 보모 구실을 해왔다고도 주장한다.

    J씨는 2000년대 초반 강원 원산시 갈마초대소에서 김정일을 만난 적이 있다. 갈마초대소에 들어섰을 때 ‘조선의 어머니’라는 노래가 들렸다. 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앉은 김정일을 바라봤다. 김정일 옆에는 고영희가 앉았고, 김옥은 서 있었다.

    “고영희는 김정일의 부인, 김옥은 지도자 일정을 담당하는 기술서기로 봐야 한다.”

    J씨 주장대로라면 김옥이 조선의 어머니가 될 소지는 거의 없다. J씨는 1998년부터 대남부서인 통일전선부 101연락소에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에서 북한을 연구한다.

    살아 있는 ‘조선의 어머니’ 누구냐?

    201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 때 대중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왼쪽).

    김정남(40)은 동거녀 혹은 첫째 부인 성혜림(1937~2002년)의 아들이다. 북한 후계 문제 전문가인 세종연구소 정성장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기 전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은 조선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내막은 다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이 맞았다.

    성혜림은 경남 창녕군 출신이다. 북한은 남한 출신을 성분이 나쁘다고 여겨 홀대한다. 배우로 일한 성혜림은 1970년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해 1년 뒤 김정남을 낳았지만 김일성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1974년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 뒤 성혜림은 러시아로 추방됐다. 남한 출신 이혼녀인 데다 언니(성혜랑), 조카(이한영)가 탈북한 여인이 조선의 어머니가 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김정남은 장남이지만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 것이다. 성혜림의 아들 김정남이 사랑한 여인 가운데 한 명은 서울에 있다(상자기사 참조).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북한에선 김정철(30),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1953~2004년) 우상화 조짐이 나타났다. 북한 내부 문서로도 확인된다. 고영희가 김영숙을 제치고 사실상 정실에 올랐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시기는 훨씬 앞일 수도 있다. 고영희는 재일동포 귀국자 출신으로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수로 일했다. 고영희 역시 조선의 어머니가 되기엔 한계가 상당하다. 1976년께부터 김정일과 동거했는데, 두 아들 외에 딸 김여정도 낳았다. 김여정은 1987년생이라는 사실 외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이 대목에서 김옥으로 되돌아가보자. 성혜림, 고영희는 죽었다. 김영숙은 살아 있으나(사망했을 수도 있지만 죽었다는 정보는 없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 혁명가계니, 혁명정통이니 하는 것은 조작할 수도 있다. 지난해 10월 김정은이 북한 대중과 세계에 공식 데뷔한 북한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 때 김옥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연단 뒤 기둥에 서 있었다. 촬영 장면을 엄별해 방송하는 조선중앙TV가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상징적인 장면이다.

    김경희 or 김설송 소문만 무성

    김정일 요리사로 일한 후지모토 겐지(64)는 김옥을 가까이서 본 북한 권부 밖 인사다. 그는 “김정철과 김정운은 김옥을 ‘옥이 이모’가 아니라 그냥 ‘옥이’라고 불렀다. 김옥은 유령처럼 조용한 존재였다”고 증언했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김옥도 조선의 어머니감이 아니다. 하지만 후지모토 증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과장했거나 만들어낸 얘기가 많다는 것.

    북한 소년소녀는 학교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행적뿐 아니라, 조선의 어머니들(강반석, 김정숙)의 행적도 익힌다. 앞에서 살펴봤듯, 김정일의 여인 가운데 조선의 어머니가 될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이를 찾기란 어렵다. 딱 떨어지는 조선의 어머니 후보가 없다는 건 북한 체제가 갈 데까지 갔다는 방증일 수 있다.

    물론 다른 후보도 있다. 김경희(김정일의 동복동생)와 김설송. 1974년생으로 김일성대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진 김설송은 결혼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J씨는 김설송을 긴 생머리에 군복을 입은 여자로 기억한다.

    “김설송은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그랬듯 김정일의 신변보호와 선전선동을 맡고 있다.”

    혁명가계, 혁명정통을 강조하는 북한 세습 체제가 강반석과 김정숙을 잇는 조선의 어머니를 배출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 북한 로열패밀리가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가족이 반군에 체포된 것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를 상대로 줄타기 외교에 나선 북한 체제는 견고해 보이지만, 역사의 갈림길은 벼락처럼 찾아오곤 한다.

    김정남의 여자 신디 서울에 산다

    南 정보당국, 2005년 신병 확보…한때 유흥주점에 나가기도


    북한 로열패밀리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여인은 ‘신디(Cyndy)’라는 예명으로만 알려진 한국 여성이다. 복수의 정보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마카오의 한 유흥주점에서 일하던 이 여성은 중국어를 익힌 뒤 고급 손님을 주로 상대하는 호스티스로 일했고, 2004년 무렵 김정남을 처음 만나 사실상 동거생활을 했다. 당시는 김정일의 셋째 부인 혹은 첩이던 고영희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김정남이 활동 공간을 점차 넓히던 시점. 평소 김정남의 동선을 꾸준히 확인하던 정보당국은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할 무렵부터 이 여성의 존재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관계자의 말이다.

    “실제로 얼굴이 그리 예쁜 편은 아니다. 우리끼리는 김정남이 왜 빠져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본인은 ‘북한에서는 그 사람만 보면 다들 죽는 시늉을 하는데, 나는 톡톡 튀는 맛이 있어 눈에 띄었다고 ‘아저씨’가 그랬다’고 말한다. 김옥 등 김정일의 부인들도 비슷한 점 때문에 눈에 들었다는 보고가 있는 터여서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동거생활을 정리한 이후 정보당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여성을 인터뷰해 김정남에 대한 개인정보를 상당량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적인 습관이나 취향, 활동 방식, 주요 동선을 꼼꼼히 파악해 상당한 수준의 첩보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 이 여성도 김정남과 함께 찍은 사진을 여러 장 제시하는가 하면, 김정남의 등에 있는 문신 등 함께 생활한 사람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구체적인 신상정보를 제공했다. 북한의 후계자 후보 가운데 한 명이던 김정남을 추적하는 일에 엄청난 공력을 기울이던 정보당국으로선 큰 도움일 수밖에 없었다.

    2005년 우리 측 제의를 받고 서울에 들어온 이 여성은 정보기관들의 ‘공동관리’를 받으며 지원받은 정착금으로 카페를 열었지만, 장사가 잘되지 않아 정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이 무렵부터 당국 관리가 소홀해졌다는 사실. 우호적인 남북관계 유지에 공들이던 당시 정부가 로열패밀리와 관련한 민감한 사항을 건드리는 일을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 당국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 때문에 당초 이 여성을 전담하던 정보당국 직원의 임무가 해제되고 정기적으로 연락해 특이 동향 유무만 확인하는 정도로 방침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 여성은 한때 서울 서초동 인근의 유흥주점에서 일하는 등 생계에 곤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해 북한 후계자가 3남 김정은으로 확정되고 김정남이 해외를 떠도는 신세로 전락함에 따라 ‘정보 가치’도 급속히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한 전직 정부당국자는 “북한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장차 어떤 분란이나 갈등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만큼 김정남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가진 이 여인에 대해서는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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