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와사키 하라 전철역 자전거주차장에서 일하는 일본 노인.
일본에서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요금소(톨게이트)를 지날 때면 또 하나의 익숙지 않은 장면을 만난다. 요금소에 근무하는 직원이 모두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인 것이다. 한국의 요금소 직원도 젊은 여성에서 중년 여성으로 바뀌었지만, 고령자가 그 자리를 꿰찰 날도 그리 머지않은 듯하다.
# 실버 파워에 답이 있다 - 육아는 우리에게 맡겨라
일본 고령자의 파워는 골프장, 요금소 외에도 식당, 할인유통점 등 사회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일본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고령자의 비율은 약 23%. 인구 5명 중 1명이 고령자다. 75세 이상도 인구 10명당 1명일 정도로 초고령 사회다. 통계만으로는 분명 세계에서 손꼽히는 늙은 나라다. 하지만 일하는 ‘젊은 노인’이 있어서인지 일본사회는 여전히 활기를 유지하며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다. 65세가 넘어 경로우대증만 받으면 이내 ‘쉬는 노인’이 돼버리는 한국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일본 효고(兵庫) 현 남동부에 위치한 이타미(伊丹) 시의 ‘실버인재센터’(이하 센터)는 2000년부터 맞벌이 부부를 위한 육아지원사업을 펼치는데, 특히 고령자를 육아지원에 적극 활용해 성공한 사례로 유명하다. 센터는 시내 한 보육원의 운영을 맡으면서 보육원 인가증을 반납했다. 보육원을 비인가로 돌림으로써 부모의 취업 여부와 상관없이 보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를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인가 보육원에는 맞벌이 부부만 아이를 맡길 수 있다.
센터가 고령자를 영입한 것은 저녁까지 아이들을 돌보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08년 10월 문을 연 이곳에는 현재 55명의 아이가 다니고 있는데, 지금도 이곳에 아이를 보내려는 부모가 많아서 수십 명이 대기 중이다. 센터에서는 정규 직원인 보육사 5명과 실버 회원 38명이 일한다. 실버 회원은 원칙적으로 하루 6시간, 월 12~13일만 일하며 하루 3교대다.
# 평생현역 사회 도래 - 기업의 평생직장 실현 노력
실버 회원 중에는 보육사 자격증을 가진 경험자도 4명이나 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지금 세대의 육아 방법은 우리와 다르니까 보육사를 지원만 하자’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아기 띠를 사용하면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편리하다”며 젊은 보육사들에게 노하우를 전달하기도 한다. 핵가족화로 아이들이 조부모를 접할 기회가 많이 줄어든 이때 고령자들은 어린아이들과 생활하면서 활력을 되찾고, 고령자의 풍부한 경험은 젊은 보육사, 아이를 맡긴 부모, 그리고 아이에게 ‘안심’을 선사한다.
2006년 일본 산업계에는 ‘재고용 쇼크’라는 폭풍이 몰아쳤다. 일본 정부가 그해 4월 개정한 ‘고령자 고용안정법’을 발효했기 때문이다. 내용은 직원을 65세까지 의무적으로 재고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업들은 정년 폐지, 정년 연장, 계속고용제도(재고용 등) 가운데 1개를 선택해 실시해야 했다. 이 조치는 재계에 큰 파장을 던졌지만, 기업들도 베이비붐 세대(단카이 세대)의 일시 퇴장으로 일손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의 90% 이상이 재고용 형식의 계속고용제도를 도입하면서 법 제정 취지에 화답했다.
세계 2위의 에어컨 제조업체 ‘다이킨 공업’. 60세 이후 재고용률이 83%에 달하는 이 회사는 1991년부터 계속고용제도를 도입했다. 연봉은 일률적으로 540만 엔. 정년 이전의 80%를 준다. 이 회사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65세 이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다. 2001년 도입한 ‘시니어 스킬 계약사원제도’로 전문지식과 넓은 인맥을 갖추고 있다는 점만 입증하면 원할 때까지 일할 수 있다. 현재 이 제도를 바탕으로 65세 이상 고령자 100여 명이 일하고 있으며, 최고령자는 74세다.
일본 유명 백화점 ‘다카시마야(高島屋)’는 2001년부터 65세까지 재고용하는 ‘골든 에이지 플랜’을 도입했다. 단카이 세대의 정년퇴직으로 숙련된 영업 인력이 대거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이 백화점 베이비용품점에서는 젊은 여성이 재고용된 고령 여성에게 접객 서비스 노하우를 전수받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골프장, 요금소, 식당 등에서 일하는 직원 상당수는 노인이다.
현재 다카시마야 백화점의 전체 직원 가운데 10%가량이 재고용된 고령자다. 주로 정년을 1~2년 앞두고 희망자를 모집하는데 현역시절 큰 문제가 없는 한 80%가량이 재고용된다. 이 회사 사장은 “정년퇴직자들은 그 나름대로 직장에서 전문성과 경험을 쌓았다. 한창 일할 나이인 그들에게서 일을 빼앗는 것은 사회적 낭비”라고 말한다. 은퇴 인력 흡수 등 고령화시대를 함께 고민하는 일본 기업들의 노력으로 일본은 ‘평생현역 시대’를 맞고 있다.
도쿄 시부야(澁谷) 구에 위치한 자동차교습소 ‘코야마 드라이빙스쿨’은 2009년 6월 고령자를 대상으로 ‘할리데이비슨 강좌’를 신설했다. 벌써 670명이 수강을 마치고 ‘꿈의 질주’를 한다. 수강생은 대부분 청춘시절 히피영화인 데이스 호퍼 감독의 ‘이지 라이더(Easy Rider)’에 감동받은 단카이 세대. 할리 데이비슨은 이 영화 주인공이 타면서 열풍을 일으켰다. 교습소 사장은 “동경(憧憬)하던 할리를 타고 일본을 일주하고 싶다는 수강생이 많다”며 “은퇴 이후 과거의 꿈을 실현하려는 고령자가 많아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 직연(職緣)에서 지연(地緣)으로 - 고령자 버팀목은 지자체
도쿄의 고서점이 모여 있는 간다(神田)의 고급 기타 판매점에도 젊은 시절의 꿈에 재도전하는 고령자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또한 60세가 넘어 샹송 가수의 길을 걷는 여성 노인들이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60대 연령의 1인당 월평균 소비지출은 24만6952엔(2009년 기준), 우리 돈으로 약 300만 원에 달한다. 일본 고령자들의 재력이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자신을 위해 돈을 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쿄의 백화점을 낮 시간대에 방문하면, 백화점 레스토랑에서 70대 여성 고령자들이 스테이크 런치세트와 생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자녀 교육비와 결혼비용 지원금 등으로 ‘활기찬 소비생활’에 제약을 받는 한국 고령자들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과거 어떤 경력을 쌓았든, 결국 고령자는 자기가 거주하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직장의 인연(직연·職緣)’에서 ‘지역의 인연(지연·地緣)’으로 귀화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활동무대는 지역으로, ‘지연의 인생’이 펼쳐진다. 이 때문에 일본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들은 고령자의 성공적인 ‘지연 생활’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도쿄 아다치(足立) 구의 사례가 흥미롭다.
이곳에서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고령 세대를 위해 대학을 만들었다. 대학 이름은 ‘아다치 지역데뷔 대학’. 해당 지자체가 마련한 지역 정착 프로그램이다. 강의는 ‘지연 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선배의 경험을 배우고, 실제로 지역 활동을 체험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은퇴 이후의 라이프스타일은 물론, 자연스럽게 지역에 데뷔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준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향후 활동 계획표를 작성하기도 한다. 또한 회사 경험을 살려 지역에 공헌하고, 다양한 모임에 참가해 같은 세대와 교류할 수 있는 기회도 갖는다.
# 내 장례식은 내가 정한다 - 눈길 끄는 일본 고령자의 ‘종활(終活)’
지역 고령자를 배려하는 일본 지자체 활동은 적극적이고 다양하다. 그중 일본 ‘고령사회백서’에 나온 성공 사례 하나가 눈에 띈다. 도쿄 기타(北) 구의 한 상가회. 점심식사 시간을 앞둔 상가 사무실에 고령자들이 모여든다. 기타 구가 주최하는 ‘고령자 친목 식사회’ 참가자다.
이 지자체는 1984년부터 혼자 사는 고령자의 안부를 확인할 목적으로 자원봉사자들이 주 1회 식사배달을 하는 서비스를 해왔다. 하지만 노인이 집에서 혼자 식사하면 외로움을 느끼고, 체력도 약화된다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2006년부터 친목 식사회를 만들었다. 상가 사무실을 비롯해 현재 20여 곳의 연회장에서 식사회를 갖는데 연간 1만 명 이상이 참여한다.
최근 일본 고령자 사이에서는 ‘종활(終活)’이라는 키워드가 눈길을 끈다. 일본에서는 취업 활동을 ‘취활(就活)’, 결혼 준비를 ‘혼활(婚活)’이라고 하는 등 주로 ‘활(活)자’를 사용해 그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하는데, 최근 ‘종활’이 등장한 것. ‘종활’은 말 그대로 ‘끝내는 활동’이다. 즉, 인생 종말을 제대로 준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녀에게 혼란을 주지 않겠다는 일본 고령자들의 ‘준비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시에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로도 삼는다고 한다.
‘종활’ 트렌드의 대표적인 예로 ‘엔딩 노트(Ending Note)’를 들 수 있다. 2010년 가을께 등장한 엔딩 노트는 5만 부 이상 팔렸을 정도로 인기다. 은행계좌, 보험 증서, 유산 등의 재산목록을 정리하거나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해보는 항목도 있다. 생전에 묘지를 예약하는 고령자가 증가하는 것도 요즘 일본 고령사회의 트렌드다.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례식까지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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