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열네 살 소녀는 서울 잠실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 전문극장 ‘롯데월드 예술극장’에 갔다. 생애 처음으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볼 목적이었다. 객석도 무대도 크지 않은 작은 극장이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배경과 조명 아래 조금은 낡고 어색한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춤추고 노래 부르며 자신의 끼를 마음껏 뽐냈다. 배우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와 목소리의 떨림까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그 무대에 소녀는 넋을 잃고 말았다. 이후 소녀는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았다. 영화 보는 비용에 조금만 보태면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었다. 소녀의 마음속엔 잘생기진 않아도 목소리가 좋은 ‘남경주 오빠’가 조금씩 자리 잡았다. 그때는 몰랐다. 상당수 번역 뮤지컬이 저작권료도 지불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2011년 2월, 서른네 살 기자는 서울 잠실에 있는 뮤지컬 전문극장 샤롯데씨어터를 찾았다. 톱스타 조승우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지킬 앤 하이드’를 보기 위해서였다. 조승우가 출연하지 않은 날이었음에도 1240석 객석이 꽉 찼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뮤지컬 관객이 많았나 싶을 정도다. 어린 학생부터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녀까지 관객의 면면도 다양했다. 일본인 관광객의 모습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화려한 무대와 웅장한 음악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의 뛰어난 노래 솜씨와 연기, 안무에 관객은 환호했다. ‘지킬 앤 하이드’의 제작사인 (주)오디뮤지컬컴퍼니 신춘수 대표는 “‘지킬 앤 하이드’의 노래를 작곡한 프랭크 와일드혼이 이 공연을 보더니 ‘연출과 연기, 노래 솜씨 등 모든 게 완벽하다’며 극찬했다”고 전했다.
뮤지컬(musical)은 노래와 춤,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공연 양식이다. 서사를 담당한 극작가와 연출가가 뮤지컬의 한쪽 축이라면,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와 음악감독은 또 다른 축이다. 춤을 맡은 안무가의 역할 역시 중요하다. 배우도 노래와 춤, 연기 모두 잘해야 한다. 또 뮤지컬은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정통극이라기보단 대중이 웃고 즐기는 오락에 가깝다.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는 365일 공연이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뮤지컬 명소다.
‘오페라의 유령’ 이전과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은 익숙한 대중문화가 됐다. 포털사이트에서 ‘뮤지컬’을 검색하면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관련 기사도 차고 넘친다. 2011년 1~2월만 찾아봐도, 브로드웨이를 겨냥해 50억 원이 넘는 제작비를 투입해 만들었다는 대형 창작 뮤지컬 ‘천국의 눈물’ 소식부터 연일 매진 행렬을 이루는 라이선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사상 초유의 리콜 사태를 일으켰던 뮤지컬 ‘미션’, 단독 캐스팅된 여주인공 옥주현의 갑작스러운 공연 취소로 논란이 된 라이선스 뮤지컬 ‘아이다’ 등 내용도 다양하다. 특히 조승우, 김준수(JYJ) 등 톱스타의 출연 덕에 뮤지컬 소식은 ‘핫’한 연예 뉴스 중 하나가 됐다. 2010년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에서 올린 매출만 945억대. 지난해 뮤지컬 전체 시장 규모는 2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와중에 KBS ‘남자의 자격’으로 스타덤에 오른 박칼린 뮤지컬 음악감독은 2월 17일 ‘2011년 문화예술국 대국민 업무보고’에서 “한국 뮤지컬 배우와 스태프 등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창의성을 키우지 못한 채 지나치게 라이선스 뮤지컬에 의존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한국에서 좋은 창작 뮤지컬이 나오려면 음악, 연출 등에서 창의적인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수많은 뮤지컬 관계자가 “한국 뮤지컬은 지난 10여 년 동안 외형상 급성장했지만, 내실은 공고히 다지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뮤지컬 전문 월간지 ‘더 뮤지컬’ 박명성 편집장은 “1999년 영화 ‘쉬리’가 한국 영화 지형을 바꿔놓았듯, 2001년 초연된 ‘오페라의 유령’이 70억 원대의 순수익을 올리면서 한국 뮤지컬 시장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며 “즉 2011년 한국 뮤지컬 시장의 문제는 2001년 이후 급속하게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체코 라이선스 뮤지컬 ‘햄릿’ 프로듀서인 (주)아르떼피아 이철주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작품 선정과 대관, 투자 유치, 스태프 및 배우 구성 등 뮤지컬 제작의 전 과정에서 엄청난 거품이 생겨났다”고 강조했다.
우선 작품 선정부터 살펴보자. 뮤지컬은 크게 창작, 라이선스, 오리지널(또는 투어) 캐스트의 세 가지 형태로 나뉜다. 창작 뮤지컬은 우리나라 뮤지컬 제작사가 저작권을 가진 작품으로 ‘명성황후’ ‘천국의 눈물’ ‘사랑은 비를 타고’ ‘김종욱 찾기’ 가 대표적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외국에서 창작된 뮤지컬의 공연권을 사서 무대에 올리는 작품. ‘오페라의 유령’ ‘캣츠’ ‘아이다’ ‘지킬 앤 하이드’ 등 상당수 유명 뮤지컬이 여기에 속한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계약 형태에 따라 원작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올리기도 하고, 우리나라 제작팀이 상당 부분 재창작하기도 한다. ‘지하철 1호선’이 후자의 예다. 오리지널(또는 투어) 캐스트 뮤지컬은 말 그대로 외국 배우 및 제작팀이 내한해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2001년 이후 뮤지컬 시장에 돈이 몰리면서, 우리나라에서 제작하는 뮤지컬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보통 연간 창작, 라이선스 등을 합쳐 150편 내외를 무대에 올리는데, 이는 시장 규모가 우리보다 훨씬 큰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 버금가는 수치다. 하지만 뮤지컬은 관람료가 비싸기 때문에 1년에 볼 수 있는 작품 수에 한계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앞선 박칼린 감독의 말처럼,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이 지나치게 라이선스 뮤지컬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우선 관객이 어느 정도 내용이 검증된 라이선스 뮤지컬을 선호한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2010년 뮤지컬 인기 순위 1위부터 9위까지 라이선스 뮤지컬이 차지했다(표 참고). 창작 뮤지컬 ‘김종욱 찾기’가 겨우 10위에 올라 체면치레를 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행한 ‘2008 뮤지컬 실태조사’에 따르면, 작품 수 기준으로 창작 뮤지컬의 비중이 54.2%인 반면, 라이선스 뮤지컬은 27.2%에 불과했다는 것(2007년 기준). 즉 창작 뮤지컬은 주로 소극장(300석 내외) 무대에 올리기 때문에 작품 수는 많지만 매출이 크지 않은 반면, 라이선스 뮤지컬은 주로 중극장(600석 내외)이나 대극장(900석 내외)에서 상연하기 때문에 매출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다. 다음은 이철주 대표의 설명.
“유명 뮤지컬의 라이선스를 따려는 국내 제작사 간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 한때 토니상(Tony Awards·미국 브로드웨이 연극, 뮤지컬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면, 국내 제작사 담당자들이 팩스 앞에 앉아 결과가 나자마자 ‘우리가 공연권을 사겠다’는 문서를 보낼 정도였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국내 제작사 간 과당경쟁으로 라이선스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졌고, 불리한 계약조건도 감수하고 있다.”
대관 역시 쉽지 않다. 뮤지컬은 연극에 비해 공연 스케일이 크다. 특히 라이선스 뮤지컬은 오케스트라까지 동연하는 대규모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뮤지컬 전용 극장은 샤롯데씨어터 하나다. 대극장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LG아트센터, 우리금융아트센터 등 손에 꼽을 정도다. 600석 이상의 중극장을 포함해도 서울 기준 15개 내외에 불과하다.
장기 공연을 하지 못하는 이유
순천향대 원종원 신문방송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는 “우리나라 뮤지컬 프로듀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대관’일 정도로 항상 극장 부족에 시달린다”며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는 1년 이상 장기 공연이 대부분이고, ‘오픈 런’(끝나는 날짜를 지정하지 않고 계속 공연하는 것) 공연도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뮤지컬 수에 비해 극장이 적다 보니 모두 1~2개월씩밖에 공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초기 제작비가 동일한 상황에서 뮤지컬은 장기 공연을 할수록 고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단기 공연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을 확보하고 극장을 대관한 후에는 제작비를 유치해야(즉 투자를 받아야) 뮤지컬을 무대에 올릴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전 뮤지컬계에서 “돈이 없어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로 투자를 끌어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창업투자회사(이하 창투사·중소기업 창업 활성화와 육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벤처 캐피털의 한 형태)들이 뮤지컬 시장에 무척 관대했기 때문. 그 이유로는 뮤지컬은 영화나 기타 산업처럼 원금 대비 10~100배 터지는 ‘대박 상품’은 없지만 △라이선스 뮤지컬 중심으로 어느 정도 흥행하는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고 △손실이 나도 영화처럼 완전히 망하는 일도 없으며 △공연 기간이 짧다 보니 투자금 회수도 빠르다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취재 중 만난 여러 명의 뮤지컬 프로듀서는 “창투사들은 절대 자신들이 손해 보지 않도록 계약한다”고 귀띔했다. 순수 투자가 아닌, 원금보장형 약정 투자가 많다는 것. 즉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투자자에게 원금을 보장해주고 모든 손실은 제작사가 안아야 하는 구조다. 이철주 대표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뮤지컬계에서 통용하는 용어인 ‘333 원칙’에 따라 창작 뮤지컬을 만들거나, 흥행이 보장되는 라이선스 뮤지컬에 의존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333 원칙’은 규모 300석 미만, 배우 3명 이하, 제작비 3억 원 미만을 뜻하는 말로, 이렇게 제작하면 크게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출연료가 비싸도 ‘티켓 파워’를 가진 스타를 캐스팅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스타 캐스팅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신춘수 대표는 “‘지킬 앤 하이드’의 조승우는 아무리 출연료가 비싸도, 극의 완성도나 관객 동원력 모두 그 이상을 해주는 배우”라며 “스타 캐스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적절하지 않은 스타 캐스팅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스타 캐스팅이 제작비를 높이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33 원칙’ 지키면 최소 본전은 한다?
(주)설앤컴퍼니 설도윤 대표는 “시장 성장 속도에 비해 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인력은 턱없이 부족해, 굳이 스타가 아니더라도 뮤지컬 배우와 스태프의 인건비가 무척 비싸졌다”고 했다. 그는 “뮤지컬 오디션을 하면 수많은 사람이 몰리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춘 건 10%에 불과하다”며 “실력 있는 배우들이 중복 출연하는 이유도 괜찮은 배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배우보다도 스태프의 부족이 더욱 심각하다. 특히 우리나라 뮤지컬 산업이 라이선스 위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기술 스태프보다는 극작가, 작곡가 등 창작 담당 스태프가 훨씬 모자라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든 피해는 관객에게 돌아간다. 원종원 교수는 “지나치게 많은 수의 작품 제작, 비싼 라이선스 비용, 고수익을 낼 수 없는 단기 공연, 흥행에 대한 제작자들의 과도한 집착, 스타 캐스팅, 배우 및 스태프 제작비 상승 등은 모두 비싼 티켓 가격에 고스란히 반영됐다”며 “이런 거품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뮤지컬 산업이 발전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뭘까.
많은 뮤지컬 업계 관계자가 장기 공연이 가능한 뮤지컬 전용극장의 확대를 꼽았다. 한 작품을 1년 동안만 한 무대에 올릴 수 있다면, 티켓 가격은 절반 정도로 싸질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비싼 가격 때문에 뮤지컬을 볼 수 없었던 관객을 더욱 확보할 수 있다. 원 교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다음은 원 교수의 설명.
“단순히 극장만 늘리는 게 아니라,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처럼 뮤지컬과 다른 문화상품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뮤지컬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부가 문화정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업자들은 비싼 땅값을 치르고 수익이 나지 않는 극장을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매해 6월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처럼 지자체가 뮤지컬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것도 좋다. 만약 대구가 실험적 형태나 트라이 아웃(tryout·본 공연을 하기 전에 하는 실험 공연) 성격의 뮤지컬을 먼저 선보이는 곳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영국의 에든버러(웨스트엔드에 입성하기 전 다양한 뮤지컬을 실험적으로 보여주는 프린지 극장이 몰려 있다)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대기업의 투자도 절실하다. 하지만 창투사 같은 형태의 투자가 아닌, 이익과 손실을 함께 나누는 ‘공동제작’의 형태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현재 뮤지컬 산업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대기업은 CJ E&M이다.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50%에 이른다. 업계에서는 ‘CJ가 없으면 뮤지컬 제작을 못한다’고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CJ E&M 공연투자제작팀 이성훈 팀장은 “직접 만들지 않는 경우에도 뮤지컬 제작의 제반 사항, 즉 자금 조달뿐 아니라 홍보, 마케팅, 해외 수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며 “이는 단순한 투자가 아닌 공동제작”이라고 강조했다.
최근엔 극장 역시 뮤지컬 공동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지킬 앤 하이드’의 경우 샤롯데씨어터가 공동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즉 뮤지컬 제작사가 샤롯데씨어터를 ‘대관’한 게 아니라, 샤롯데씨어터가 객석을 현물 투자했다고 봐야 한다. ‘천국의 눈물’의 주인공 김준수 역시 출연료를 받지 않고 지분 참여를 했다.
아시아 뮤지컬 허브? 아니면 노예?
이성준 음악감독은 “라이선스 뮤지컬을 들여오더라도, 국내에서 재창작할 부분이 많도록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각색하면서 걸맞은 대사와 음악을 창조해 넣는다면, 스태프에게 좋은 훈련 기회가 되는 것은 물론 관객도 한층 새로우면서 친숙한 뮤지컬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
뮤지컬 프로듀서인 설도윤 대표나 신춘수 대표는 “창작 뮤지컬로 승부를 보되 한국적인 소재와 스태프, 자본 등에 국한하지 말고 글로벌적 협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32~35쪽 참조). 이성훈 팀장 역시 “CJ E&M은 뮤지컬 해외시장 개척에 더욱 힘쓸 계획”이라며 “일본과 중국에서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2001년 ‘오페라의 유령’ 성공 이후 10년이 흘렀다. 뮤지컬 시장에서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올 시기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지금 아시아의 뮤지컬 허브로 부상할지, 아니면 라이선스 뮤지컬의 노예가 될지 갈림길에 서 있다.
#2011년 2월, 서른네 살 기자는 서울 잠실에 있는 뮤지컬 전문극장 샤롯데씨어터를 찾았다. 톱스타 조승우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지킬 앤 하이드’를 보기 위해서였다. 조승우가 출연하지 않은 날이었음에도 1240석 객석이 꽉 찼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뮤지컬 관객이 많았나 싶을 정도다. 어린 학생부터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녀까지 관객의 면면도 다양했다. 일본인 관광객의 모습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화려한 무대와 웅장한 음악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의 뛰어난 노래 솜씨와 연기, 안무에 관객은 환호했다. ‘지킬 앤 하이드’의 제작사인 (주)오디뮤지컬컴퍼니 신춘수 대표는 “‘지킬 앤 하이드’의 노래를 작곡한 프랭크 와일드혼이 이 공연을 보더니 ‘연출과 연기, 노래 솜씨 등 모든 게 완벽하다’며 극찬했다”고 전했다.
뮤지컬(musical)은 노래와 춤,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공연 양식이다. 서사를 담당한 극작가와 연출가가 뮤지컬의 한쪽 축이라면,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와 음악감독은 또 다른 축이다. 춤을 맡은 안무가의 역할 역시 중요하다. 배우도 노래와 춤, 연기 모두 잘해야 한다. 또 뮤지컬은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정통극이라기보단 대중이 웃고 즐기는 오락에 가깝다.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는 365일 공연이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뮤지컬 명소다.
‘오페라의 유령’ 이전과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은 익숙한 대중문화가 됐다. 포털사이트에서 ‘뮤지컬’을 검색하면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관련 기사도 차고 넘친다. 2011년 1~2월만 찾아봐도, 브로드웨이를 겨냥해 50억 원이 넘는 제작비를 투입해 만들었다는 대형 창작 뮤지컬 ‘천국의 눈물’ 소식부터 연일 매진 행렬을 이루는 라이선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사상 초유의 리콜 사태를 일으켰던 뮤지컬 ‘미션’, 단독 캐스팅된 여주인공 옥주현의 갑작스러운 공연 취소로 논란이 된 라이선스 뮤지컬 ‘아이다’ 등 내용도 다양하다. 특히 조승우, 김준수(JYJ) 등 톱스타의 출연 덕에 뮤지컬 소식은 ‘핫’한 연예 뉴스 중 하나가 됐다. 2010년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에서 올린 매출만 945억대. 지난해 뮤지컬 전체 시장 규모는 2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와중에 KBS ‘남자의 자격’으로 스타덤에 오른 박칼린 뮤지컬 음악감독은 2월 17일 ‘2011년 문화예술국 대국민 업무보고’에서 “한국 뮤지컬 배우와 스태프 등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창의성을 키우지 못한 채 지나치게 라이선스 뮤지컬에 의존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한국에서 좋은 창작 뮤지컬이 나오려면 음악, 연출 등에서 창의적인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수많은 뮤지컬 관계자가 “한국 뮤지컬은 지난 10여 년 동안 외형상 급성장했지만, 내실은 공고히 다지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뮤지컬 전문 월간지 ‘더 뮤지컬’ 박명성 편집장은 “1999년 영화 ‘쉬리’가 한국 영화 지형을 바꿔놓았듯, 2001년 초연된 ‘오페라의 유령’이 70억 원대의 순수익을 올리면서 한국 뮤지컬 시장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며 “즉 2011년 한국 뮤지컬 시장의 문제는 2001년 이후 급속하게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체코 라이선스 뮤지컬 ‘햄릿’ 프로듀서인 (주)아르떼피아 이철주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작품 선정과 대관, 투자 유치, 스태프 및 배우 구성 등 뮤지컬 제작의 전 과정에서 엄청난 거품이 생겨났다”고 강조했다.
우선 작품 선정부터 살펴보자. 뮤지컬은 크게 창작, 라이선스, 오리지널(또는 투어) 캐스트의 세 가지 형태로 나뉜다. 창작 뮤지컬은 우리나라 뮤지컬 제작사가 저작권을 가진 작품으로 ‘명성황후’ ‘천국의 눈물’ ‘사랑은 비를 타고’ ‘김종욱 찾기’ 가 대표적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외국에서 창작된 뮤지컬의 공연권을 사서 무대에 올리는 작품. ‘오페라의 유령’ ‘캣츠’ ‘아이다’ ‘지킬 앤 하이드’ 등 상당수 유명 뮤지컬이 여기에 속한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계약 형태에 따라 원작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올리기도 하고, 우리나라 제작팀이 상당 부분 재창작하기도 한다. ‘지하철 1호선’이 후자의 예다. 오리지널(또는 투어) 캐스트 뮤지컬은 말 그대로 외국 배우 및 제작팀이 내한해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2001년 이후 뮤지컬 시장에 돈이 몰리면서, 우리나라에서 제작하는 뮤지컬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보통 연간 창작, 라이선스 등을 합쳐 150편 내외를 무대에 올리는데, 이는 시장 규모가 우리보다 훨씬 큰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 버금가는 수치다. 하지만 뮤지컬은 관람료가 비싸기 때문에 1년에 볼 수 있는 작품 수에 한계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앞선 박칼린 감독의 말처럼,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이 지나치게 라이선스 뮤지컬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우선 관객이 어느 정도 내용이 검증된 라이선스 뮤지컬을 선호한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2010년 뮤지컬 인기 순위 1위부터 9위까지 라이선스 뮤지컬이 차지했다(표 참고). 창작 뮤지컬 ‘김종욱 찾기’가 겨우 10위에 올라 체면치레를 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행한 ‘2008 뮤지컬 실태조사’에 따르면, 작품 수 기준으로 창작 뮤지컬의 비중이 54.2%인 반면, 라이선스 뮤지컬은 27.2%에 불과했다는 것(2007년 기준). 즉 창작 뮤지컬은 주로 소극장(300석 내외) 무대에 올리기 때문에 작품 수는 많지만 매출이 크지 않은 반면, 라이선스 뮤지컬은 주로 중극장(600석 내외)이나 대극장(900석 내외)에서 상연하기 때문에 매출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다. 다음은 이철주 대표의 설명.
“유명 뮤지컬의 라이선스를 따려는 국내 제작사 간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 한때 토니상(Tony Awards·미국 브로드웨이 연극, 뮤지컬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면, 국내 제작사 담당자들이 팩스 앞에 앉아 결과가 나자마자 ‘우리가 공연권을 사겠다’는 문서를 보낼 정도였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국내 제작사 간 과당경쟁으로 라이선스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졌고, 불리한 계약조건도 감수하고 있다.”
대관 역시 쉽지 않다. 뮤지컬은 연극에 비해 공연 스케일이 크다. 특히 라이선스 뮤지컬은 오케스트라까지 동연하는 대규모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뮤지컬 전용 극장은 샤롯데씨어터 하나다. 대극장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LG아트센터, 우리금융아트센터 등 손에 꼽을 정도다. 600석 이상의 중극장을 포함해도 서울 기준 15개 내외에 불과하다.
‘캣츠’
순천향대 원종원 신문방송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는 “우리나라 뮤지컬 프로듀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대관’일 정도로 항상 극장 부족에 시달린다”며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는 1년 이상 장기 공연이 대부분이고, ‘오픈 런’(끝나는 날짜를 지정하지 않고 계속 공연하는 것) 공연도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뮤지컬 수에 비해 극장이 적다 보니 모두 1~2개월씩밖에 공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초기 제작비가 동일한 상황에서 뮤지컬은 장기 공연을 할수록 고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단기 공연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을 확보하고 극장을 대관한 후에는 제작비를 유치해야(즉 투자를 받아야) 뮤지컬을 무대에 올릴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전 뮤지컬계에서 “돈이 없어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로 투자를 끌어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창업투자회사(이하 창투사·중소기업 창업 활성화와 육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벤처 캐피털의 한 형태)들이 뮤지컬 시장에 무척 관대했기 때문. 그 이유로는 뮤지컬은 영화나 기타 산업처럼 원금 대비 10~100배 터지는 ‘대박 상품’은 없지만 △라이선스 뮤지컬 중심으로 어느 정도 흥행하는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고 △손실이 나도 영화처럼 완전히 망하는 일도 없으며 △공연 기간이 짧다 보니 투자금 회수도 빠르다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흥행보증수표로 떠오른 조승우.
아무리 출연료가 비싸도 ‘티켓 파워’를 가진 스타를 캐스팅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스타 캐스팅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신춘수 대표는 “‘지킬 앤 하이드’의 조승우는 아무리 출연료가 비싸도, 극의 완성도나 관객 동원력 모두 그 이상을 해주는 배우”라며 “스타 캐스팅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적절하지 않은 스타 캐스팅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스타 캐스팅이 제작비를 높이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33 원칙’ 지키면 최소 본전은 한다?
(주)설앤컴퍼니 설도윤 대표는 “시장 성장 속도에 비해 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인력은 턱없이 부족해, 굳이 스타가 아니더라도 뮤지컬 배우와 스태프의 인건비가 무척 비싸졌다”고 했다. 그는 “뮤지컬 오디션을 하면 수많은 사람이 몰리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춘 건 10%에 불과하다”며 “실력 있는 배우들이 중복 출연하는 이유도 괜찮은 배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배우보다도 스태프의 부족이 더욱 심각하다. 특히 우리나라 뮤지컬 산업이 라이선스 위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기술 스태프보다는 극작가, 작곡가 등 창작 담당 스태프가 훨씬 모자라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든 피해는 관객에게 돌아간다. 원종원 교수는 “지나치게 많은 수의 작품 제작, 비싼 라이선스 비용, 고수익을 낼 수 없는 단기 공연, 흥행에 대한 제작자들의 과도한 집착, 스타 캐스팅, 배우 및 스태프 제작비 상승 등은 모두 비싼 티켓 가격에 고스란히 반영됐다”며 “이런 거품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뮤지컬 산업이 발전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뭘까.
많은 뮤지컬 업계 관계자가 장기 공연이 가능한 뮤지컬 전용극장의 확대를 꼽았다. 한 작품을 1년 동안만 한 무대에 올릴 수 있다면, 티켓 가격은 절반 정도로 싸질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비싼 가격 때문에 뮤지컬을 볼 수 없었던 관객을 더욱 확보할 수 있다. 원 교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다음은 원 교수의 설명.
“단순히 극장만 늘리는 게 아니라,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처럼 뮤지컬과 다른 문화상품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뮤지컬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부가 문화정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업자들은 비싼 땅값을 치르고 수익이 나지 않는 극장을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매해 6월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처럼 지자체가 뮤지컬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것도 좋다. 만약 대구가 실험적 형태나 트라이 아웃(tryout·본 공연을 하기 전에 하는 실험 공연) 성격의 뮤지컬을 먼저 선보이는 곳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영국의 에든버러(웨스트엔드에 입성하기 전 다양한 뮤지컬을 실험적으로 보여주는 프린지 극장이 몰려 있다)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대기업의 투자도 절실하다. 하지만 창투사 같은 형태의 투자가 아닌, 이익과 손실을 함께 나누는 ‘공동제작’의 형태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현재 뮤지컬 산업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대기업은 CJ E&M이다.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50%에 이른다. 업계에서는 ‘CJ가 없으면 뮤지컬 제작을 못한다’고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CJ E&M 공연투자제작팀 이성훈 팀장은 “직접 만들지 않는 경우에도 뮤지컬 제작의 제반 사항, 즉 자금 조달뿐 아니라 홍보, 마케팅, 해외 수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며 “이는 단순한 투자가 아닌 공동제작”이라고 강조했다.
최근엔 극장 역시 뮤지컬 공동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지킬 앤 하이드’의 경우 샤롯데씨어터가 공동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즉 뮤지컬 제작사가 샤롯데씨어터를 ‘대관’한 게 아니라, 샤롯데씨어터가 객석을 현물 투자했다고 봐야 한다. ‘천국의 눈물’의 주인공 김준수 역시 출연료를 받지 않고 지분 참여를 했다.
아시아 뮤지컬 허브? 아니면 노예?
‘오페라의 유령’초연은 7개월 동안 무대에 올랐다. 이처럼 장기 공연이 가능했던 건 2001년 당시 신생극장인 LG아트센터가 이 뮤지컬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프로듀서인 설도윤 대표나 신춘수 대표는 “창작 뮤지컬로 승부를 보되 한국적인 소재와 스태프, 자본 등에 국한하지 말고 글로벌적 협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32~35쪽 참조). 이성훈 팀장 역시 “CJ E&M은 뮤지컬 해외시장 개척에 더욱 힘쓸 계획”이라며 “일본과 중국에서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2001년 ‘오페라의 유령’ 성공 이후 10년이 흘렀다. 뮤지컬 시장에서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올 시기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지금 아시아의 뮤지컬 허브로 부상할지, 아니면 라이선스 뮤지컬의 노예가 될지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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