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정연한 무색의 아이들에게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이 영화에서 ‘선’은 가장 중요한 이미지다. 독일어 원제 ‘das weisse Vand’에는 서정적인 뉘앙스 ‘하얀 리본’보다는 하얀 끈의 의미가 더 강렬하다. 의사를 낙마하게 한 ‘줄’은 누가 매단 것일까. 목사는 아들이 자위를 했다고 손을 흰 ‘끈’으로 침대에 묶었고, 늦게 귀가한 아이들은 순결의 상징인 하얀 ‘리본’을 달고 다닌다. 또한 사태의 진상을 아는 소녀는 쉼 없이 ‘뜨개질’을 한다.
아이들은 하얀 선분처럼 일사불란하게 복종적이고 흠 없이 예의 바르고 질서 정연하지만 부모의 억압, 순결과 순혈의 강조로 꽁꽁 묶인 마음 밑바닥에는 부모에 대한 복수심과 그에 비례하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래서 소작농 아들은 어머니가 죽자 “지주에게 복수하려면 차라리 낫을 들고 가서 머리를 베어버려라”라는 아버지의 비아냥거림에 대한 화답으로, 지주의 밭에 들어가 낫으로 사람 머리통을 연상시키는 양배추를 모두 참수한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음악도, 색도 없는 금욕적인 화면으로 관객에게 상상 이상의 잔혹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부모에게 회초리질을 당하는 스펙터클도 문 뒤에서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고,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분노의 불길도 그 색을 빼앗긴다. 오직 근경과 원경이 부딪치고, 앞과 뒤가 부딪치는 영화 찍기의 미학으로 세대 간 갈등과 충격적인 진상이 은근히 드러날 뿐.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범인이 누구인가’ 하는 스릴러의 동력은 모호한 진실의 구렁텅이와 끝까지 경쟁한다. 화자는 학교 선생이지만 그 역시 젊은 날 로맨스에 마음을 빼앗겼다. 목사는 다친 새를 기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새가 낫게 되면 날려버릴 수 있는가?”물어보며 새의 부모가 돼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기르던 새가 죽자, 아이의 새를 다시 새장에 넣어 기른다. 온 천지에 흰 눈이 내리고, 아이들은 찬송가를 부르고 목사는 변함없이 목회를 주도한다.
‘하얀 리본’의 모호하고 열린 결말은 사실 하얀 리본의 무채색이 주는, 숨 막히는 전체주의와 잔혹한 도덕률이 독일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독버섯처럼 기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답답하고 불쾌하고 진득진득한 잔혹 동화에 담긴 현대 역사의 단면을 진저리쳐지게 직면시킨다.
‘Moral Man, Immoral Society.’ 인간은 윤리적인데, 그 인간이 모여 만든 사회는 비윤리적이라는 니부어의 명제. 그곳에는 언제나 하얀 리본이, 흰 끈이, 흠 없는 줄이 그리고 우리 현대 역사에서도 펄럭였던 하얀 완장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