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작 박 전 대표는 그동안 ‘친박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공석이든 사석이든 친박계와 관련한 말을 할 때는 “소위 친박계라는…” “이른바 친박계가…”라고 꼭 사족(?)을 단다. 자신은 계파 정치를 인정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 인용할 뿐이라는 의미다. 친박계 의원들은 2008년 18대 총선이 끝난 뒤 국회의원 모임 형태로 친박계를 ‘공식화’하자는 건의를 했지만, 박 전 대표는 “그럴 필요가 있느냐. 국민에게 분파적으로 비친다”며 반대했다. 이 때문에 친박계는 총선 당시 당 잔류파 중심의 ‘선진사회연구포럼’과 복당파가 결성한 ‘여의포럼’ 같은 연구모임 형태로만 결속력을 다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박 전 대표가 친박계 결집에 본격적으로 나선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무엇보다 6월 29일 세종시 수정안 국회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직접 반대토론에 나선 것은 의외였다. 친박계의 홍사덕·허태열 의원 등 중진은 물론, 구상찬 의원을 비롯한 일부 초선의원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말렸지만 박 전 대표는 발언을 강행했다. 왜 그랬을까.
지도부 경선에서 ‘박근혜 마케팅’
지난 2005년 4월 교섭단체 대표연설 이후 5년 2개월 만에 본회의장 발언대에 오른 것은 세종시 원안 고수를 강조해온 입장에서 이 문제를 매듭짓는 데 대한 소회를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정치권에서 시작된 문제로 갈등과 분열이 커져 국민께 매우 죄송스럽다. 오늘 표결을 끝으로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접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물론 박 전 대표가 반대토론에 나선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도 없지 않다. 바로 ‘친박계 표 단속’이다. 국회 해당 상임위인 국토해양위에서 부결된 세종시 수정안을 친이계가 다시 본회의에 부의한 것은 부결될 때 부결되더라도 누가 반대했는지 역사의 기록에 남겨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자 친박계 일부 의원이 슬그머니 본회의에 불참하거나 소신 투표를 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왔고,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박 전 대표가 쐐기를 박은 측면이 있다.
실제 기명투표로 실시된 세종시 수정안 표결에서는 한나라당의 계파 간 세력분포가 그대로 드러났다. 세종시 수정안에 찬성한 105명 중 친이계는 90명(나머지는 중립 성향)으로 파악됐다. 표결에 불참한 의원까지 포함하면 친이계가 100명에 육박한다는 그간의 추측이 사실로 나타난 셈이다. 반대표 164표를 분석한 결과, 한나라당 친박계는 43명(나머지는 야당표)으로 파악됐다. 박 전 대표의 표 단속에도 불구하고 진영·최구식 의원 등이 이탈했다. 이 같은 투표 결과에 대해선 “박 전 대표의 반대토론이 오히려 친이계를 결집시킨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박 전 대표는 이후 7·14전당대회 과정에서도 친박계 후보를 꼭꼭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전체 12명의 지도부 경선후보 중 친박계 후보 4명(서병수, 이성헌, 한선교, 이혜훈)의 선거사무소(캠프) 개소식에만 참석했다. 예전 같으면 분파적 행동이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자제했을 일이다. 이는 친박계 후보들의 ‘박근혜 마케팅’에 보조를 맞춰주는 동시에 공평한 참석으로 친박계 후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박심(朴心) 논란’을 잠재우는 부수적 효과도 거뒀다.

박근혜 전 대표가 6월 2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세종시 수정안 표결을 앞두고 반대 토론을 하고 있다.
계파정치에 부정적이던 박 전 대표가 이처럼 친박계 결집에 적극성을 띠는 것은 차기 대권경쟁의 개막에 앞서 집안단속을 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친박계 일부 의원은 “차기 대선후보 경선을 2년여 남겨둔 시점인 만큼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라는 건의를 많이 했다. 내부에서 제기된 ‘박근혜 역할론’도 같은 맥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