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창설 당시 유럽 7개국으로 출발한 국제축구연맹은 현재 208개 회원국을 거느린 거대 단체가 됐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5일 열린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조 추첨식 모습.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 드디어 막을 올렸다. TV를 통해 지구촌 구석구석에 중계되는 축구 경기에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면서 축구 열기가 5대양 6대주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 전 세계 총 260억 명이 TV로 경기를 관람했다고 한다. 60억 남짓한 지구촌 주민 한 사람당 4~5회는 중계방송을 시청한 셈이다. 월드컵에 대한 높은 관심이 보여주듯 축구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보급되고, 또 사랑받는 스포츠 중 하나다. 축구의 인기는 몇 가지 수치에서 잘 나타난다. 20세기 초 창설 당시 유럽대륙 7개 국가로 출발한 국제축구연맹(FIFA)이 지금은 유엔보다 훨씬 많은 208개 회원국을 거느린다. 남아공월드컵 지역예선에는 모두 204개국이 참가했는데, 이는 사상 최대 규모라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참가국과 맞먹는 숫자다.
축구가 왜 이렇게 인기를 누리고, 어떻게 세계를 정복하게 됐을까? 축구 애호가들은 공과 발이 어우러져 극적 승부를 연출하는 축구 자체의 매력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축구가 개별 국가나 세계적 수준에서 인기 스포츠로 발전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고, 일정한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다.
축구는 19세기 영국의 ‘발명품’이다. 축구의 기원과 관련해 영국의 헐링(hurling), 프랑스의 술(soule), 이탈리아의 칼치오(calcio) 등 중세와 근대 초 유럽 각지의 마을 축제나 교회 행사 때 민중이 즐겼던 집단 공놀이가 종종 언급된다. 하지만 이들 전통 민속놀이는 독특한 경기 방식을 갖춘 하나의 스포츠로서 축구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더구나 그것들은 산업화 이전에 대부분 사라져 축구 등장 시기에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土 휴무, 임금인상 등 노동운동 결과 축구 인기몰이
오늘날의 축구는 이튼(Eaton), 해로(Harrow), 럭비(Rugby) 등 잉글랜드의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 즉 사립 엘리트 중등학교에서 탄생했다. 퍼블릭 스쿨에서 축구는 원래 학생들 사이에서 신입생을 길들이기 위한 체벌수단으로 행해지다 1830~40년대에 정규 교과과정에 도입됐다. 당시 교육개혁을 시도하던 학교 당국은 축구에서 체력과 정신력의 연마라는 교육 효과를 기대하고 경기장 규격과 경기 시간, 선수 수 등 구체적인 경기 규칙을 만들었다. 처음에 이 규칙은 학교마다 달랐다. 예컨대 퍼블릭 스쿨 럭비의 경기 방식에서는 공을 손으로 만지거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는 것을 허용한 반면, 이튼이나 해로 등에서는 부상을 초래하기 쉽다는 이유로 두 가지 모두 금지했다.
학교마다 다른 경기 방식은 1863년 통일됐다. 여러 학교 대표가 수차례 모여 논의한 끝에 손과 정강이 차기를 금지한 규칙을 채택했고, 이 규칙을 따르는 잉글랜드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를 결성했다. 그러나 퍼블릭 스쿨 럭비는 처음부터 이 규칙을 맹렬히 반대했고, 손을 허용하는 경기 방식을 옹호하는 세력을 따로 모아 럭비풋볼협회를 만들었다. 이로써 축구, 즉 ‘어소시에이션(협회) 풋볼’과 ‘럭비 풋볼’이 분리됐다.
잉글랜드의 퍼블릭 스쿨이 근대축구의 요람이었다는 사실에서 보듯, 축구를 탄생시킨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러나 축구를 엘리트가 아닌 대중의 스포츠로 키운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축구협회 창설 후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등 영국 곳곳에 축구 클럽이 생기고 전국 각지에서 경기가 열렸을 때, 노동자들은 선수 혹은 관중으로서 축구의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19세기 후반 노동운동을 통해 쟁취한 토요일 오후 휴무제와 임금인상 덕분에 축구 경기와 관람은 많은 노동자의 주말 유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던 노동자들까지 수십 가지 신문이 전하는 주말경기 결과를 일상의 화제로 삼아, 19세기 말 축구는 영국에서 가장 활발한 대중 스포츠가 됐다.
1930년 제1회 우루과이월드컵의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결승전. 우루과이월드컵은 우수선수 유치와 경기 질적 향상을 요구하는 관중의 열기를 확인하면서 프로축구 발전의 촉진제가 됐다.
유럽대륙에 축구가 전파됐을 당시 이 새로운 스포츠의 이름과 경기 관련 용어는 영어 그대로 수용됐으며, 축구 클럽의 명칭에도 영어가 사용됐다. 그럼에도 대륙의 축구 발전에는 영국과 비교할 만한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났다. 영국의 축구 대중화에는 지역주의가 한몫했다. 지방 축구팀에 대한 지지와 후원은 지방적 정체성과 애향심을 반영했고, 동시에 그것을 창출했다. 그러나 유럽대륙의 축구는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 민족주의 열기와 강대국의 환상 속에서 정치가, 군, 사회단체가 축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후원에 나섰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축구는 범(汎)게르만주의의 지원을 받았으며 러시아에서는 범슬라브주의 색채를 띠었다. 다민족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민족별로 다양한 하위문화의 구성요소가 됐다.
정치적 판단능력을 마비시키는 ‘아편’인가
민족주의와 결합한 대륙의 축구는 이제 종주국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영어 명칭을 사용하던 경기단체들도 자국어로 개칭했으며, 축구라는 이름도 모국어로 바꿨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전통 공놀이에서 유래한 칼치오를 선택했다. 축구와 민족주의의 결합은 전간기(戰間期)인 1920~30년대 정점에 달했다. 유럽과 남미대륙 내부, 그리고 대륙 간 국제대회가 잇따라 창설되면서 축구는 스포츠 민족주의의 전형이 됐다.
축구의 대중화와 짝을 이뤄 축구 발전을 자극한 직업축구의 등장에서도 유럽대륙은 영국과 차이가 있었다. 노동자들을 통해 축구가 대중화된 영국에서는 아마추어리즘을 고집하는 젠틀맨들의 반발에도 19세기 말 이미 직업축구가 정착됐다. 반면 유럽대륙의 경우 20세기 초까지도 축구는 중간계급의 전유물이었고, 프로축구는 대체로 영국보다 40여 년 뒤진 1930년대 초에야 도입됐다. 당시 대공황기의 경제위기와 함께 선수들의 생계 문제가 부각됐고 우수 선수 유치, 선수 기량 강화, 경기의 질적 향상, 관중의 증가를 위해 프로축구 도입은 더 이상 거스르기 어려운 추세였다. 아마추어리즘을 견지하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의 갈등을 배경으로 1930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제1회 월드컵대회는 직업축구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며, 월드컵대회 자체가 프로축구의 발전을 촉진했다.
대중화, 상업화의 길을 통해 발전해온 축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부르주아 엘리트들은 축구가 아마추어 원칙과 페어플레이 정신을 저버리자 고개를 돌렸다.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에서 유래한 축구가 노동운동을 방해하려는 술책이 아닐까 의심했다. 현대의 사회분석가들은 축구를 대중의 정치적 판단능력을 마비시키는 ‘아편’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석과 비판은 옳지만 일면적이다.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남미의 군사정권이 정치 선전과 통제 수단으로서 축구를 이용하려 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축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했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는 독재에 저항하는 보루가 되기도 했다. 이런 모순된 사례들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자명하다. 축구는 결코 정치와 무관한 중립적인 것이 아니지만, 문제는 축구 자체가 아니라 축구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