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의 최대 정치 현안은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 후텐마(普天間) 캠프 이전이다. 2005년 미일 정부는 오키나와 남부 기노완(宜野灣) 시에 있는 후텐마 기지를 중동부 해안의 슈와브 캠프로 옮기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 합의사항은 지난해 여름 치른 일본 총선에서 이슈가 됐다. 현 집권 민주당이 기지 이전이 아니라 폐쇄를 희망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여론을 의식해 오키나와 외부로 기지를 이전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민주당은 이 선거공약을 두고 그동안 미국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결국 공약을 포기했고, 근자에는 하토야마 총리가 나서서 오키나와 주민들을 설득하고 양해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가운데 공약 철회의 책임문제로 총리가 사퇴압력에 직면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와 귀추가 주목된다.
오키나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파국적인 패배와 외세의 점령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일본의 역사적 경험을 응축하고 있으며, 특히 전후 군사동맹 파트너로 발전한 미일관계를 상징한다. 이처럼 오키나와는 일본 현대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지만 이 섬의 존재가 처음부터 일본사의 일부를 구성한 것은 아니다.
일본 본토 규슈 남단에서 타이완 사이에 호를 그리며 약 1000km 이어지는 열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오키나와는 원래 주민들의 언어나 풍속 등이 본토와 구별됐고, 오랫동안 일본과는 별개의 역사를 발전시켰다. 동아시아 대륙에서 규슈를 거쳐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키나와 원주민은 14세기 이후 섬 북부와 중부, 남부에 3개의 부족국가로 나뉘어 있다, 15세기 전반 남부의 항구도시 나하(那覇) 인근 수리(首里)를 중심으로 통일국가 류큐(琉球) 왕국을 세웠다.
1897년 메이지 정부, 450년 역사 류큐 왕국 해체
동아시아의 남북을 잇는 해상로에 자리한 류큐 왕국은 약 2세기 동안 해상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류큐 왕국의 교역 대상에는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나아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이 포함됐으나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나라는 중국이었다. 류큐 왕국은 14세기 후반 명 왕조 초기부터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중국의 책봉을 거쳐 왕위를 계승했으며, 해상무역에 필요한 선박도 중국에서 제공받았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류큐 왕국에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에도(江戶) 막부시대를 열었던 시기에 규슈 지역 사쓰마 번(藩)의 영주가 군사를 동원, 류큐 왕국을 정복한 것이다.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군사적으로 정복했으나 조공을 요구했을 뿐 왕국은 존속시켰다.
명나라가 일본과의 교역을 금하고 있던 상황에서 류큐 왕국은 중국과의 우회적인 교역로 노릇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류큐 왕국의 존속이 득이 된 만큼 에도시대 일본은 왕국을 영토의 일부로 병합하기보다 일본과는 다른 외국으로 분리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일본 주민들에게 중앙 막부의 허락 없이는 류큐 왕국의 방문을 금했고, 류큐 주민들에게는 일본식 이름과 복장·관습을 따라하지 못하게 했다.
류큐 왕국과 일본의 관계는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180도 달라졌다. 1867년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친정체제를 수립한 메이지 정부는 1879년 ‘류큐 처분’이라는 조치를 통해 450여 년간 존속한 류큐 왕국을 해체하고,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 현으로 재편한 메이지 정부는 섬 주민들을 상대로 동화정책을 시행했다. 1891년 공표된 천황의 교육칙어와 함께 천황 사진을 오키나와 학교에 배포했고, 오키나와 방언 대신 일본 표준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또 오키나와식 이름과 복장 대신 일본식을 따르게 했고, 감아올린 상투형 머리 스타일 대신 단발을 요구했다. 이뿐 아니라 곳곳에 신사를 세워 고유의 민간신앙을 일본의 신토(神道) 신앙으로 대체하려 했다.
동화 정책은 1930년대 접어들어 일본에 군국주의가 대두하고 군부가 중심이 돼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도발하면서 강도를 더했다. 일본 국민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던 군부의 황민화 정책은 ‘류큐 처분’에 반대 여론이 있었고, 19세기 말 징병제가 도입된 뒤 병역기피 경향이 강했던 오키나와에서는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의 목에 걸게 한 방언찰(方言札)의 존재가 말해주듯 동화를 위해 각종 규제와 강압이 동원됐다.
태평양 전쟁 일본 최후 방어기지…희생자 10만이 민간인
일본 군국주의 지배 아래 오키나와 주민들이 겪었던 고통은 1931년 만주침략에서 시작된 전쟁이 1937년 중국에 이어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확대되면서 정점에 달했다. 오키나와는 15년의 아시아·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 영토 내에서 전투가 전개된 유일한 경우였다. 이 전투는 전쟁 막바지에 방어와 공격에 나선 일본, 미국 양측이 전력을 집중한 결전의 성격을 띠었다. 1945년 3월 말부터 약 3개월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총 20만 명이 희생됐는데 그중 반 이상이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희생이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전투가 본격화하기 전부터 고난을 겪었다. 그들은 비행장과 진지 구축에 동원됐고,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군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야 했으며, 미군의 공습과 해상 봉쇄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전투가 본격화하면서 섬은 그야말로 ‘지옥의 전장’으로 변했고, 주민들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초와 희생을 경험했다. 많은 주민이 ‘철의 폭풍’, 즉 공중폭격, 함포사격, 육상전투에서 쏟아지는 미군의 포탄에 희생되거나 식량의 고갈로 아사하고 말라리아 등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다. 적군뿐 아니라 아군도 그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투항을 막고자 투항을 권하는 미군 전단지를 가진 주민은 스파이 용의자로 몰아 처단했으며, 탄약과 식량이 바닥난 절망적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동굴에 피신한 주민들이 일본군의 강요로 벌인 끔찍한 집단자살극은 오키나와 전투의 참혹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오키나와 전투 이후 이 섬의 운명은 미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종전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한동안 군정을 실시했다. 군정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되찾았을 때 종식됐으나, 오키나와는 예외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1950년 6·25전쟁 발발 등에 자극받은 미국은 오키나와에 대한 군정을 연장했다. 미국은 무엇보다 전략상 요충지인 이 섬을 군사기지로 활용하려 했다. 토지를 수용하고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군정은 주민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이를 억눌렀다. 언론, 집회, 출판 활동,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간 왕래 등을 통제했고 시장 선거, 사법부 판결 등에도 압력을 행사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으로의 복귀 운동을 전개했고, 60년대 말 미국은 오키나와 반환을 약속했다. 1971년 반환협정이 조인되고, 이에 따라 이듬해 5월 오키나와는 26년 만에 다시 일본의 영토가 됐다. 그러나 반환 후에도 미국은 미일 상호안보동맹 조약에 따라 오키나와의 군사기지를 유지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섬 면적의 18%에 달하고, 오키나와 주둔 미군 수는 일본 전역 미 병력의 약 75%에 이른다. 미군기지 문제에서 오키나와 주민과 미국 모두가 수용할 만한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하토야마 총리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의 불만과 반발은 이해할 만하다. 그들로서는 연전의 합의를 고집하는 미국보다 섣불리 합의 백지화를 공언했다가 태도를 바꾼 정치인이 더 문제가 될 듯하다.
민주당은 이 선거공약을 두고 그동안 미국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결국 공약을 포기했고, 근자에는 하토야마 총리가 나서서 오키나와 주민들을 설득하고 양해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가운데 공약 철회의 책임문제로 총리가 사퇴압력에 직면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와 귀추가 주목된다.
오키나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파국적인 패배와 외세의 점령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일본의 역사적 경험을 응축하고 있으며, 특히 전후 군사동맹 파트너로 발전한 미일관계를 상징한다. 이처럼 오키나와는 일본 현대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지만 이 섬의 존재가 처음부터 일본사의 일부를 구성한 것은 아니다.
일본 본토 규슈 남단에서 타이완 사이에 호를 그리며 약 1000km 이어지는 열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오키나와는 원래 주민들의 언어나 풍속 등이 본토와 구별됐고, 오랫동안 일본과는 별개의 역사를 발전시켰다. 동아시아 대륙에서 규슈를 거쳐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키나와 원주민은 14세기 이후 섬 북부와 중부, 남부에 3개의 부족국가로 나뉘어 있다, 15세기 전반 남부의 항구도시 나하(那覇) 인근 수리(首里)를 중심으로 통일국가 류큐(琉球) 왕국을 세웠다.
1897년 메이지 정부, 450년 역사 류큐 왕국 해체
동아시아의 남북을 잇는 해상로에 자리한 류큐 왕국은 약 2세기 동안 해상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류큐 왕국의 교역 대상에는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나아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이 포함됐으나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나라는 중국이었다. 류큐 왕국은 14세기 후반 명 왕조 초기부터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중국의 책봉을 거쳐 왕위를 계승했으며, 해상무역에 필요한 선박도 중국에서 제공받았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류큐 왕국에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에도(江戶) 막부시대를 열었던 시기에 규슈 지역 사쓰마 번(藩)의 영주가 군사를 동원, 류큐 왕국을 정복한 것이다.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군사적으로 정복했으나 조공을 요구했을 뿐 왕국은 존속시켰다.
명나라가 일본과의 교역을 금하고 있던 상황에서 류큐 왕국은 중국과의 우회적인 교역로 노릇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류큐 왕국의 존속이 득이 된 만큼 에도시대 일본은 왕국을 영토의 일부로 병합하기보다 일본과는 다른 외국으로 분리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일본 주민들에게 중앙 막부의 허락 없이는 류큐 왕국의 방문을 금했고, 류큐 주민들에게는 일본식 이름과 복장·관습을 따라하지 못하게 했다.
류큐 왕국과 일본의 관계는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180도 달라졌다. 1867년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친정체제를 수립한 메이지 정부는 1879년 ‘류큐 처분’이라는 조치를 통해 450여 년간 존속한 류큐 왕국을 해체하고,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 현으로 재편한 메이지 정부는 섬 주민들을 상대로 동화정책을 시행했다. 1891년 공표된 천황의 교육칙어와 함께 천황 사진을 오키나와 학교에 배포했고, 오키나와 방언 대신 일본 표준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또 오키나와식 이름과 복장 대신 일본식을 따르게 했고, 감아올린 상투형 머리 스타일 대신 단발을 요구했다. 이뿐 아니라 곳곳에 신사를 세워 고유의 민간신앙을 일본의 신토(神道) 신앙으로 대체하려 했다.
동화 정책은 1930년대 접어들어 일본에 군국주의가 대두하고 군부가 중심이 돼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도발하면서 강도를 더했다. 일본 국민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던 군부의 황민화 정책은 ‘류큐 처분’에 반대 여론이 있었고, 19세기 말 징병제가 도입된 뒤 병역기피 경향이 강했던 오키나와에서는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의 목에 걸게 한 방언찰(方言札)의 존재가 말해주듯 동화를 위해 각종 규제와 강압이 동원됐다.
태평양 전쟁 일본 최후 방어기지…희생자 10만이 민간인
1945년 7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투항한 일본군 몸 수색을 하는 미군들.
그리고 전투가 본격화하면서 섬은 그야말로 ‘지옥의 전장’으로 변했고, 주민들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초와 희생을 경험했다. 많은 주민이 ‘철의 폭풍’, 즉 공중폭격, 함포사격, 육상전투에서 쏟아지는 미군의 포탄에 희생되거나 식량의 고갈로 아사하고 말라리아 등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다. 적군뿐 아니라 아군도 그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투항을 막고자 투항을 권하는 미군 전단지를 가진 주민은 스파이 용의자로 몰아 처단했으며, 탄약과 식량이 바닥난 절망적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동굴에 피신한 주민들이 일본군의 강요로 벌인 끔찍한 집단자살극은 오키나와 전투의 참혹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오키나와 전투 이후 이 섬의 운명은 미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종전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한동안 군정을 실시했다. 군정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되찾았을 때 종식됐으나, 오키나와는 예외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1950년 6·25전쟁 발발 등에 자극받은 미국은 오키나와에 대한 군정을 연장했다. 미국은 무엇보다 전략상 요충지인 이 섬을 군사기지로 활용하려 했다. 토지를 수용하고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군정은 주민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이를 억눌렀다. 언론, 집회, 출판 활동,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간 왕래 등을 통제했고 시장 선거, 사법부 판결 등에도 압력을 행사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으로의 복귀 운동을 전개했고, 60년대 말 미국은 오키나와 반환을 약속했다. 1971년 반환협정이 조인되고, 이에 따라 이듬해 5월 오키나와는 26년 만에 다시 일본의 영토가 됐다. 그러나 반환 후에도 미국은 미일 상호안보동맹 조약에 따라 오키나와의 군사기지를 유지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섬 면적의 18%에 달하고, 오키나와 주둔 미군 수는 일본 전역 미 병력의 약 75%에 이른다. 미군기지 문제에서 오키나와 주민과 미국 모두가 수용할 만한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하토야마 총리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의 불만과 반발은 이해할 만하다. 그들로서는 연전의 합의를 고집하는 미국보다 섣불리 합의 백지화를 공언했다가 태도를 바꾼 정치인이 더 문제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