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질환을 다룬 영화들. 자폐증을 앓는 주인공이 등장한 ‘말아톤’과 ‘레인 맨’. 사이코패스 범죄 스릴러를 표방한‘추격자’(왼쪽부터).
‘사이코’ 성공 이후 대담한 시도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장르 관습(어떤 한 장르의 작품을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자주 쓰는 설정들. 가족드라마 장르의 ‘세대 간 단절’ 등이 대표적인 예)을 통해 상업성을 추구하는데, 뇌질환을 소재로 하면 장르의 개성이 무너지고 ‘인간 드라마’라는 좁은 틀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각종 뇌질환 중 단기기억상실 정도만 스릴러 장르에서 하나의 장치로 활용되는 데 그쳤다.
하지만 1960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영화 ‘사이코’를 통해 뇌질환을 장르와 접목시키는 데 성공했다. 스릴러 장르의 기본인 일련의 범죄행각을 ‘사이코패스’와 연결한 것. 물론 프리츠 랑의 ‘M’(1931) 등 연쇄살인범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를 정신장애와 결부해 풀어낸 영화는 없었다. 히치콕 감독은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이코’의 마지막 10분을 할애해 정신과 의사로 하여금 관객에게 범죄자의 정신이상을 설명하게 했다.
사이코패스 살인범 테마는 처음엔 공포 장르에서 소화됐지만, 곧 범죄 스릴러 장르로 확대돼 나갔다. 돈 시겔의 ‘더티 해리’(1971)가 그 신호탄이다. 이 장르 관습이 꾸준히 이어져 호러-범죄 스릴러의 걸작인 ‘양들의 침묵’(1991)에서 극점에 올랐다.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첫 번째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다. 이후 유사한 영화가 쏟아져나왔다.
드라마 장르에서도 1970년대에 이르러 뇌질환을 다루기 시작했다. 힌트를 준 것은 조셉 헬러의 베스트셀러 ‘캐치 22’(1961)로, 군대 내 정신질환자를 통해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는 내용이다. ‘캐치 22’는 1970년 영화화됐다.
1975년에는 정신병동을 소재로 한 인간 드라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아카데미상 5개 부문을 석권하며 어마어마한 흥행을 거뒀다. 그러자 유사 테마의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정신병동 영화’라는 하부 장르가 생겨날 정도였다. ‘피셔 킹’(1991)과 ‘처음 만나는 자유’(1999) 등이 좋은 예다.
이렇듯 뇌질환 영화에 대중이 호감을 보이자 할리우드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사이코패스나 정신병동이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더 많은 질환을 더 많은 장르에서 소비한 것이다. 1988년 ‘레인 맨’으로 시작된 이 같은 경향은 199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자폐증, 뇌성마비, 알츠하이머 등 다양한 뇌질환을 다루며 뇌의 이곳저곳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뇌질환을 소재로 한 영화의 붐은 몇 가지 할리우드식 계산법에 근거한다. 첫째, 배우들이 원했다. 배우의 연기 도전에서 장애인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고 싶어 하는 역할이다. 그만큼 연기력을 인정받기 쉬운 장르인 데다, 신체손상보다 정신손상 쪽 연기를 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이런 시도를 부추긴다.
둘째, 영화 제작사에게도 뇌는 좋은 소재다. 일단 배우들이 하고 싶어 하므로 스타 캐스팅이 쉽고, 출연료가 적어도 기꺼이 응하니 일석이조다. 게다가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면 흥행 가능성까지 높아진다.
셋째, 영화 제작자들은 뇌질환 소재가 기존의 장르 관습에 끼워넣기 좋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뇌질환은 상황을 극단화하는 장치로 이용된다. 알츠하이머(영화 ‘아이리스’ ‘노트북’ 등)는 자신과의 추억을 점차 잊어가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딱 맞고, 정신지체(영화 ‘포레스트 검프’) 및 자폐증(영화 ‘레인 맨’) 환자는 세상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관찰자형 인물로 설정하기 좋다. 이처럼 뇌를 소재로 한 영화는 차근차근 상업화 단계를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는 뇌 기능과 관련한 ‘기억’의 테마가 스크린을 누볐다. 인간의 삶이란 곧 기억이며, 기억을 변형하거나 새로 조작하면 삶 자체가 바뀐다는 발상이 등장했다. ‘블레이드 러너’(1982)와 ‘토탈 리콜’(1990) 등이 그렇게 탄생했다. 타인의 기억을 자신의 뇌에 전극으로 주입해 타인이 돼본다는 설정의 ‘스트레인지 데이즈’(1995)가 나타났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에서는 고객의 기억 일부를 지워주는 회사가 등장했다.
기억에서 파생한 하부 갈래가 바로 ‘단기기억상실증’ 테마다. 코미디 영화 ‘탐정 포그와 애완견 애꾸’(1994)에서 처음 등장한 이 질환은 범죄 스릴러 ‘메멘토’(2001)를 통해 대중에게 그 이름을 떨쳤고, 이후 ‘첫 키스만 50번째’(2004) 등에서 꾸준히 차용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영화를 살펴보자. 할리우드가 기기묘묘한 아이디어를 짜내 인간의 뇌를 조목조목 상업화하고 있을 때 ‘아시아의 할리우드’를 꿈꾸는 한국은 상당히 무덤덤했다. 뇌질환 소재의 영화라고 해봐야 근대소설을 영상화한 ‘백치 아다다’ 정도였다.
‘말아톤’ ‘맨발의 기봉이’ ‘추격자’ 등 인기
그런 측면에서 영화 ‘말아톤’(2003)은 15년 전 할리우드에서 ‘레인 맨’을 통해 성공시킨 자폐증 테마가 한국에 상륙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말아톤’은 5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거뒀고, 주연배우 조승우를 스타덤에 올렸다. 정신지체인을 다룬 ‘맨발의 기봉이’(2006) 역시 성공을 거뒀다. 비수기에 개봉됐음에도 235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정신병동 영화도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를 통해 신고식을 마쳤다.
사이코패스 범죄 스릴러가 제대로 소화되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 됐다. ‘피아노맨’(1996)과 ‘세이 예스’(2001) 등을 통해 이상심리 범죄자를 다루긴 했지만 ‘어릴 적 상처에 의해 살인마가 된’ 정도의 가벼운 분석이었다. 사이코패스 범죄 스릴러를 대대적으로 표방하고 나온 첫 영화는 신태라 감독의 ‘검은 집’(2007)이고, 빅히트한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8)가 뒤를 이었다.
이런 영화가 등장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도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에서 영화 ‘더티 해리’가 연쇄살인범 조디악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호응을 얻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유영철 사건 등 각종 사이코패스 범죄가 등장했고 이를 영화화한 작품을 대중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비해 뇌질환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TV 드라마는 별로 없다.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이나 미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선 1972년 KBS 드라마 ‘여로’에서 정신지체 장애인인 ‘영구’가 등장했지만, 그저 순수한 영혼의 대명사로 다뤄졌을 뿐이다. 이후 드라마에서 뇌질환자들은 조연급에 그쳤다. 상대적으로 가볍게 소비되는 TV 드라마에서는 장애, 특히 정신장애는 지나치게 무거운 소재다. 또 최신 유행인 ‘기억’은 TV에서 소비되기엔 지나치게 ‘똑똑한’ 소재다. 뇌와 관련해 TV 드라마가 차용하는 소재는 기억상실 정도다. 영화계의 맹렬한 러브콜과 달리, TV와 뇌의 관계는 아직까진 단순한 차원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