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대접 못 받던 어릴 적 이름은 ‘개새끼’
의사 박서양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됐다’라는 정도로만 구전돼왔을 뿐, 지금껏 그의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최근 들어 그가 세상에 알려지고 제 가치를 인정받은 데는 연세대 의대 박형우(54·해부학교실) 교수의 숨은 노력이 큰 몫을 했다. 박 교수는 박서양의 일대기를 사료 고증을 통해 밝혀내 논문으로 엮었으며, 그가 쓴 ‘제중원’이라는 책은 드라마의 모티프를 제공하기도 했다. 박 교수가 드라마의 의학 자문을 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박서양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만약 드라마의 내용을 미리 알고 싶다면 박서양의 일대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에서 황정의 어릴 적 이름은 ‘소근개’로 근수가 적게 나가는 개, 즉 ‘개새끼’라는 의미다. 그만큼 당시 백정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최하층 신분인 박서양이 의사가 된 것은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과 제중원 의사 에비슨(O. R. Avison·제중원 4대 원장)의 ‘운명적 인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박성춘을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치료했기 때문.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박성춘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를 스승처럼 따랐다고 한다.
콜레라도 박서양이 의사가 되는 데 한몫했다. 1895년 6월 콜레라가 만연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을 방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에비슨의 노력 끝에 콜레라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백정들의 해방을 탄원했다. 박성춘을 비롯한 다른 백정들의 탄원도 함께 제출됐다. 결국 1896년 2월 백정들에게도 면천(免賤)이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즉, 박서양에게 의사가 될 길이 열린 것이다.
박서양은 결혼 이후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에비슨은 박서양의 결혼식장에서 “아들놈을 병원으로 데려가 사람 좀 만들어달라”는 박성춘의 부탁을 받고도 제중원의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박서양을 병원으로 불러 청소, 침대 정리 등 온갖 궂은일을 시켰다. 박서양이 힘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처리하자 에비슨은 비로소 그에게 의학 책을 읽게 했다. 뒷날 밝혀진 일이지만 에비슨은 박서양의 사람됨을 알기 위해 일부러 그를 시험했다. 결국 박서양은 다른 6명과 함께 1908년 졸업시험을 통과해 한국 최초의 의사면허를 받았다. 박형우 교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의학 공부에서 필요한 덕목은 ‘성실성’으로, 박서양의 인간됨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1 1908년 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식. 가운데줄 맨 오른쪽이 박서양. 2 제중원 수술 장면. 학생 박서양(가운데)이 탕건을 쓰고 에비슨을 보조하고 있다. 3 박서양.
학교를 졸업한 박서양은 모교 제중원의학교의 전임교수로 화학,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외과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돌연 간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간도 지역의 조선인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군의(軍醫)로 임명돼 의료를 담당했다. 박서양은 이때 동아일보 간도지국 기자로도 활약했다.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에 힘쓰던 박서양은 1936년 귀국길에 올랐다. 박형우 교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어려워지고,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그가 설립한 숭신학교가 폐교당하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미 50대가 돼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서양은 광복을 5년 앞둔 1940년 55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영면했다.
박서양의 일대기는 2006년 박형우 교수의 논문 ‘박서양의 의료 활동과 독립운동’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박서양의 업적이 뒤늦게 밝혀진 것에 대해 박 교수는 “최근 독립운동사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쉬워진 덕에 박서양이 간도에서 활동한 내용을 개략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박서양의 손자 박연수 씨가 2005년 연세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입수한 호적등본 등 여러 자료와 당시 ‘동아일보’ ‘신동아’의 기사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1885년 설립된 제중원 전경.
2008년 광복절을 맞아 박서양은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박형우 교수는 “첫 의사면허를 받은 7명 중에서 4명이 독립유공자”라며 “수많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근대 지상주의의 미명 하에 일제 침략을 용인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며 대의(大醫)의 모습을 보여준 지식인”이라고 설명했다.
이기원 작가의 각색을 통해 황정으로 거듭난 박서양은 드라마 ‘제중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까지 진행된 드라마 내용을 보면 에비슨이 광혜원(廣惠院·제중원의 전신)의 초대 원장이자 한국에 최초로 서양의학을 전파한 H. N. 알렌으로 설정됐고, 아버지와의 인연 부분은 박서양과 알렌의 개인적 친분으로 설정됐지만, 극 전개의 흐름은 박서양의 실제 일대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칠레에 살고 있는 박서양의 손자 박연수(74) 씨는 “극의 재미를 위해 억지로 각색한 부분이 있어 좀 아쉽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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