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에선 한국 대표팀이 최강 라인업으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을 두 차례나 꺾으며 금메달을 따냈다. 2 일본 프로야구의 심장부 도쿄돔.
대표팀 간 실력 대등한 수준 … 日, 프로리그 수준과 선수층에서 韓 압도
1990년대 한일 슈퍼게임에서 참담한 결과를 맛봤던 한국 야구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09년 제2회 WBC에서 일본을 상대로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세계 야구의 주류로 우뚝 섰다. 그러나 1~2회 WBC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김인식 감독(현 한화 고문)의 평가는 냉정하다. 그는 “이제 한국은 대표팀 간 경기에서 일본과 거의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다”면서도 “우리는 이런 대표팀을 한 개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일본은 3~4개는 쉽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일본이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인정했다.
국가 간 프로리그 격차는 경기력과 산업화 수준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김 감독의 말대로 한·일 야구의 실력은 외견상 비슷하지만, 저변이나 시장규모를 따져보면 아직 격차가 크다. 양국이 최근 몇 년간 국제대회에서 엇비슷한 승부를 벌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야구는 이변이 많은 종목이라, 여러 번 경기를 해봐야 수준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 단기전인 국제대회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아직 타자나 투수들의 기본기, 경기 운영, 세밀한 플레이에서 일본 선수들이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선수층도 일본이 두텁다. 2009년 11월 한일 클럽챔피언십에서 한국의 KIA와 일본의 요미우리가 붙었는데, 결과는 KIA의 ‘접전 후 완패’였다. 승부의 핵심은 중간계투진이었다. 이승엽(요미우리)은 “국내에서는 중간계투진을 상대로 타율도 올리고 했는데, 일본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만큼 일본의 선수층이 두텁다”며 혀를 내둘렀다.
프로 선수층의 차이는 곧 아마추어팀들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팀 수에서부터 차이가 크다. 일본 고교팀은 4000여 개인 데 비해 우리는 50여 개에 불과하다. 일본 프로구단들은 이 중에서 선수를 고르고 골라 프로 유니폼을 입힌다. 여기에다 실업야구, 독립리그까지 있어 수급 자원이 넘쳐난다. 그러나 한국은 한 해 600명 이상의 ‘야구 실업자’를 양산한다.
산업화지수도 차이를 보인다. 한국은 지난해 600만명 가까운 관중을 동원했다. 사상 최다였다. 그러나 일본은 4배 가까운 2240만명에 달했다. 인구 규모를 감안해도 한국은 인구 8명당 1명, 일본은 5명당 1명꼴로 야구장을 찾았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인프라다. 일본의 돔구장은 6개. 우리는 프로구장이 7개인데, 그중 대구·광주·대전·서울 목동구장의 시설은 프로팀이 사용하는 구장이라기엔 창피할 정도다. 일본은 도처에 야구공원이 있어 남녀노소가 일상적으로 야구를 즐길 수 있다. 미래 팬들의 확보와 스타 마케팅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구조다.
한 야구인은 “타율 2할대 초반의 선수가 노력하면 2할9푼대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2할9푼에서 3할로 끌어올리기는 정말 어렵다”며 “현재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는 2할9푼과 3할의 차이로 볼 수 있다”고 비유했다.
윤승옥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 touc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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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 초등학교 수영장. 군국주의를 요체로 하는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는 기초체력 육성이라는 과제를 떠안았고, 수영 등을 기본 소양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일본 수영의 탄탄한 토양은 여기서부터 다져졌다.
일본은 박태환에만 의존하는 한국의 롤모델
2008년 베이징올림픽. 박태환(20·단국대)은 한국 수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박태환이 우승한 남자자유형 400m는 체격 조건이 불리한 아시아 선수에게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아시아 선수가 올림픽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후 처음이다.
한국보다 72년 먼저 자유형 세계 정상을 밟은 아시아 국가는 바로 일본이다. 데라다 노보루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자유형 1500m를 석권한 것. 일본은 이에 앞서 19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에서 첫 수영(평형) 금메달을 따낸 이후, 1932년 LA올림픽(금5·은5·동2)과 1936년 베를린올림픽(금4·은2·동5)을 거치며 수영 최강국으로 성장했다.
일본의 수영 스타는 국민적 영웅이다. 1940년대 ‘후지산 날치’ 후루하시 히로노신은 남자자유형 중장거리 세계 기록을 33번이나 경신하며 전후(戰後) 절망에 빠진 일본 국민에게 위안을 줬다. 재일본 대한수영연맹 김일파 회장은 “일본은 1920~30년대부터 국가적 시책으로 수영을 육성했다”고 말했다. 군국주의를 요체로 하는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는 기초체력 육성이라는 과제를 떠안았고, 수영 등을 기본 소양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국제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의 낭보가 더해지면서 열도의 수영 열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일본 수영은 일단 저변에서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등록선수는 2700여 명. 반면 일본의 등록선수는 11만명이다. 준(準)선수급 마스터스만 4만8000명이다. 매년 3월과 8월 열리는 전 일본 초등학교 수영대회에는 기준기록을 통과한 선수만 5500여 명이 출전한다. 이 기준기록은 한국의 소년체전 결선 출전기록 수준. 김 회장은 “정규 교육을 받은 일본인 중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튼튼한 토양 위에서 일본은 역대 올림픽에서 무려 62개(금20·은22·동20)의 메달을 땄다. 일본수영연맹은 연간 예산만 140억원에 이르는 체육단체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수영에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안방에서 열린 대회에서 일본 수영은 동메달 1개에 머물러 충격을 받았다. 일본수영연맹은 정책적으로 수영클럽을 육성했다. 미국, 호주 등 수영 선진국은 대부분의 선수가 클럽 중심으로 훈련한다. 현재 일본에는 2000여 개의 수영클럽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대한수영연맹 정일청 전무는 “한국도 지방 외에는 클럽 중심으로 가고 있다”며 “서울에만 전문선수를 육성하는 클럽이 7~8개 있다”고 했다. 경영대표팀 노민상 감독이 일곱 살 난 박태환을 발굴한 곳도 사설체육센터였다.
1994년 일본수영연맹은 ‘수영발전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세계랭킹 진입에 따른 인센티브 지급과 파벌을 제외한 기록 중심 선수 선발, 훈련방법의 과학화 등이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기타지마 고스케 등이 금3·은1·동4의 성적을 오리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박태환에 의존하는 한국 수영의 롤모델은 이웃 일본이다.
전영희 스포츠동아 기자 setupman@donga.com
일본은 육상에서 이미 세계 수준으로 도약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110m 허들 예선에서 질주하는 일본의 나이토 마사토(오른쪽).
실력, 지원, 관리 시스템 모두 일본과 ‘비교 불가’
기초 스포츠 종목의 대표 격인 육상은 국가 간 스포츠 경쟁력을 비교하는 절대적 잣대다. 한국과 일본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늘 순위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육상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둔 한국 육상의 현실은 한마디로 암울하다. 일본과 비교해도 참담한 현실은 그대로 드러난다.
세계선수권 및 올림픽 정식종목 47개(남 24, 여 23개)를 기준으로 한국 기록이 일본 기록을 앞선 것은 남자 800m, 높이뛰기, 포환던지기 3개 종목뿐이다. 여자 종목은 하나도 없다. 남자 800m는 이진일이 1994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육상경기대회 때 세운 1분44초14(일본 1분46초16·2009년)가 15년째 깨지지 않고, 남자 높이뛰기도 이진일이 1997년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세운 2.34m(일본 2.33m·2006년)가 아직도 난공불락이다. 그나마 2008년 황인성이 세운 남자 포환던지기 18.66m(일본 18.64m·2009년)가 최신 기록.
일본 육상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일본은 남자 24개 종목 중 200m에서 수에쓰구 신고가 20초3의 아시아 기록을 세우는 등 6개 아시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여자 종목에서는 2005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노구치 미즈키(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2시간19분12초의 아시아 기록을 작성했다.
일본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4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9년 8월 열린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남자 400m 계주에서 4위를 차지해 세계 정상에 한발 다가섰다. 세계선수권 남자마라톤에선 사토 아쓰시가 2시간12분5초로 은메달을 땄고,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은 단 하나의 아시아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9개 종목 19명의 선수를 출전시켰지만 전원 예선 탈락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시스템이 만들어낸 차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본은 중·고교 등록선수가 20만명을 넘는다. 한국은 고작 3000명도 안 된다. 일본 인구가 한국보다 3배쯤 많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큰 차이다. 일본에선 이른바 ‘직업선수’가 아니어도 모든 학생이 육상을 즐긴다. 반이나 학교에서 잘 달리면 언제나 지역대회, 전국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사회체육을 기반으로 이렇듯 저변을 다져놓았기에 일본육상경기연맹의 체계적인 선수관리 시스템이 가능했다.
한국에서는 지도자들이 사실상 강제적으로 발탁한 소수가 육상을 한다. 저변이 형편없이 얕다. 그러니 ‘잘난’ 선수 한 명이 특정 종목을 장기 집권하는 현상이 자주 나온다. 선수는 없는데 전국체전에서 성적을 내려는 지방자치단체가 많다 보니 선수의 ‘몸값’은 일본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전국체전 입상 가능 선수는 계약금 5000만~8000만원에 연봉 5000만~8000만원을 받는다. 특급 선수는 계약금 2억5000만원에 연봉 1억원은 기본. 이런 ‘배부른 돼지’를 키우는 구조이다 보니 남자 100m 한국 기록(10초34)이 30년째 깨지지 않는다. 전국체전이 한국 육상을 망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은 아테네올림픽 여자마라톤 금메달리스트 노구치가 연봉 3000만 엔을 받았다. 한화로 치면 약 3억9000만원으로 크게 보이지만, 환율이 약 13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한국보다 많은 게 아니다. 일본 실업선수 연봉 평균은 2000만~3000만 엔. 계약금은 없다. 대신 회사에서 정년을 보장한다. 선수들은 은퇴할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1년 반 앞으로 다가왔는데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전국체전에 길들여진 배부른 선수들을 배고픈 ‘맹수’로 탈바꿈시킬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암울하다.
양종구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