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풍스러운 교토의 골목.
얼마 전 한두 달 살고 오겠다며 교토로 떠나는 친구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교토 여행을 다녀온 뒤 부동산 사이트를 들여다보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친구를 이해하게 됐다. 그렇게 교토는 시나브로 마음이 스며드는 곳이다.
도둑도 넋을 놓은 아름다운 사찰
위풍당당한 아톰이 지키고 있는 교토 역은 웅장했다. 일본 건축가 하라 히로시가 설계한 교토 역은 교토의 고풍스러운 이미지와 달리 현대적인 감각으로 지어졌다. 교토 역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2층의 인포메이션 센터. 줄을 서야 지도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여행자들로 북적인다.
이번 교토 여행의 주제는 산책. 새해를 맞이하면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가장 받고 싶은 것은 “괜찮아, 괜찮아”라며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주는 위로였다. 천년 고도를 어슬렁거리며 산과 물과 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위로를 받게 되지 않을까.
교토에는 산책 코스가 많다. 긴카쿠지(銀閣寺)와 ‘철학의 길(哲の道)’을 잇는 대표적인 코스부터 대나무 숲이 아름다운 아라시야마(嵐山), 전통 집을 볼 수 있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에서 지온인(知恩院)까지 연결된 코스, 교토 시내와 다소 떨어졌지만 소박한 맛이 나는 히에이잔(比叡山)에서 야세(八瀨)까지의 코스가 꽤 알려져 있다.
코스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교토 역에서 5번 버스를 타고 난젠지(南禪寺)로 향했다. 난젠지에서 출발해 ‘철학의 길’ 긴카쿠지로 이어지는 산책. 이른 아침이지만, 5번 버스는 승객이 어찌나 많은지 서울의 출근길 지하철 2호선을 탄 기분이었다. 교토라고 해서 모든 것이 호젓한 것만은 아니었다.
난젠지 정거장에 내리면서부터 세상은 달라졌다. 길은 여유로웠고 집은 오래됐으며 어디에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한걸음 또박또박 걸어볼 길에 도착했구나!
산책의 출발지인 난젠지는 13세기에 세워진 아름다운 선종 사찰. 거대한 산문이 여행자를 맞았다. 선종 사찰에서 산문은 속세와 사찰을 나누는 경계. 산문을 지나니 겨울나무들이 무상한 인생을 형상화한 듯 허허롭게 서 있다. 산문의 2층에 오르면 난젠지의 풍경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그 안에선 물을 끌어들이던 우아한 로마식 수로도 만날 수 있다.
난젠지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꼭 등장하는 것이 가부키 ‘산문의 53그루 오동나무’에 나오는 도둑 이시카와 고에몬의 에피소드다. 도둑 고에몬은 산문에 올라 난젠지의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있다가 결국 잡히고 만다. 고에몬이 도둑이 아니라 시인이 됐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난젠지를 나와 철학의 길로 향한다. 풋풋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쏟아져나온다. 히가시야마(東山)고등학교 학생들이다. 비가 막 그친 뒤여서일까. 학생들의 싱그러움이 와락 달려든다. 이 길은 참 행운아다. 세상의 길 가운데 이렇게 멋진 이름을 가진 길이 몇이나 될까.
‘철학의 길’은 교토대 교수이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사색을 하며 걷던 길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얼마 전 교토대 마쓰모토 총장이 한 인터뷰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5명이나 배출한 힘에 대해 묻는 질문에 “많은 연구자가 철학자의 길을 산책하며 연구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했을 정도다.
특별한 것이 있느냐고? 눈으로만 보면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으로 봐야 그 길의 특별함을 만날 수 있다. 철학의 길은 작은 운하를 따라 약 2km 이어지는 길인데,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어주는 묘약을 지녔다. 졸졸거리는 물소리와 폭 좁은 다리를 건너는 길고양이, 많은 이의 고민을 들어줬을 나이테 넓은 나무들, 쉼터가 돼주었을 벤치들, 가끔 들리는 새소리까지. 걷다 보니 마음의 때가 한 겹씩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
걷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은 소소한 상점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아기자기한 가게들. 고양이를 소재로 한 공방 노비코보(のび工房)와 바람 따라 움직이는 수제 모빌을 만드는 가제노야카타(風の館), 애플파이가 맛있는 카페 뽐므는 길 위에서의 시간을 잊게 해준다.
철학의 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요지야 카페다. 기름종이 하나로 일본 여인들을 접수한 요지야라는 메이크업 브랜드가 만든 카페다. 차를 마시기도 하지만, 차보다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다. 1904년에 지어진 목조건물을 개조해 카페를 만든 것으로, 일본식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들어가면 다다미방으로 안내되는데, 손님들이 마주보고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정원 쪽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며 차를 즐기게 만들어졌다.
일본 정원에서 일본식으로 마셔보는 차 한 잔. 카페에는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메뉴도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새침한 일본 여인 요지야 캐릭터를 그려넣은 녹차 카푸치노다.
2 긴카쿠지(銀閣寺) 가는 길. 3 긴카쿠지 정원. 4 긴카쿠지 전경. 5 ‘철학의 길’ 입구. 6 요지야 카페.
산책의 마지막 코스인 긴카쿠지(銀閣寺)는 또 다른 긴카쿠지(金閣寺)와 함께 교토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대표적인 사찰이라 해서 규모가 큰 것은 아니다. 아담한 사찰과 정갈한 멋이 풍기는 정원으로 일본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긴카쿠지(銀閣寺)는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8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세운 사찰로, 무사들이 숭상했던 선종의 건축양식에 기반을 두고 지어졌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가니 동백나무가 울타리를 이루고 서 있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경계를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소박한 멋을 좋아하던 요시마사의 의지에 따라, 은각사 중심이 되는 관음전에는 은색이 칠해져 있지 않았다.
관음전 앞에는 연못이 있고, 그 옆엔 흰 모래로 자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고산수식 정원이 이어졌다. 모래를 파도 모양으로 만든 긴사덴(銀沙灘), 후지산을 상징한다는 고게쓰다이(向月臺)는 처음 만나는 고산수식 정원이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종의 가르침에 따라 만들어진 고산수식 정원.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상징성과 독특함이 잠자고 있던 상상력을 자극했다.
위로를 받기 위해 떠난 교토의 산책 여행. 위로를 해준 것은 편안한 자연이었고, 숙제를 내준 것은 일본의 문화였다.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일본을 여행했지만, 지금까지 소니와 이세탄 백화점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것일까. 1200년 역사를 가진 도시 교토. 일본 여행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일본 문화의 근원을 만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