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4번타자’ 김태균이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에, ‘꽃범호’ 이범호(오른쪽)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살아남으려면 일본 특유의 ‘현미경 야구’를 뚫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로써 김태균과 이범호는 한국 프로야구를 경험한 뒤 일본 무대에 진출한 각각 11, 12번째 선수가 됐다. 그동안 한국 프로야구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일본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한국에서의 명성을 이어나간 선수도 있지만, 기대에 못 미친 선수가 더 많았다. 심지어 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선수들도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통산 3할1푼2리에 1435안타를 치며 ‘배트를 거꾸로 잡고 쳐도 3할은 친다’라는 평가를 받던 이병규. 그는 올 시즌 종료 후 주니치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특유의 타격 스타일이 일본 전력분석원에게 노출되면서 일본 투수들에게 호되게 당한 결과다. 결국 이병규는 주니치에서 3년간 2할5푼4리 253안타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긴 채 3년 만에 보따리를 싸야 했다.
이병규의 주니치 선배이자 1997년까지 한국 야구를 주름잡던 이종범도 일본에서는 얼굴에 주름만 가득했다. 1998년 6월 한신전에서 가와지리의 공에 팔꿈치를 맞은 이후 몸 쪽 볼에 약점을 드러냈고, 외야수로 포지션을 옮긴 이후 호시노 감독과 불화가 심해지면서 원형탈모증까지 생기는 아픔을 겪었다. ‘야구천재’로 불리던 그가 3년간 일본에서 남긴 성적은 타율 2할6푼5리에 286안타 53도루.
‘국민타자’ ‘야구천재’도 못 피한 시련
‘국민타자’ 이승엽(요미우리)도 일본에서 기를 못 펴는 것은 마찬가지. 한국에서 9년간 통산타율 3할5리에 매년 평균 34개의 홈런을 쳐내던 이승엽은 제구력이 정교한 일본 투수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진출 이후 6년간 타율 2할7푼에 매년 평균 23개의 홈런을 치는 데 그쳤다. 더욱이 올해는 타율 2할2푼9리 16홈런 36타점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1990년대 국내 마운드를 주름잡다 요미우리로 스카우트된 정민철과 정민태는 각각 2년 만에 한국으로 컴백했다. 정민철은 부상 이후 쉽게 회복하지 못했고, 정민태는 가토리 수석코치와의 불화로 일본 야구에 적응하지 못했다. 두 선수가 일본에서 올린 승수의 합은 고작 5승. 이상훈과 구대성은 각각 주니치와 오릭스에서 정민철, 정민태 두 선수보다는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일본 진출 전 그들이 국내 프로야구에서 거둔 성과에 비하면 어림도 없는 성적이었다.
‘국보급 투수’인 선동열은 일본에서도 한국 야구의 위상을 떨치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1996년 주니치에 입단해 첫해에는 방어율 5.50으로 부진했지만 4시즌 동안 98세이브(10승4패)에 방어율 2.70을 기록했다. 1997년에는 시즌 최다 세이브인 37세이브를 올리기도 했다. 해태와 삼성에서 뛰던 임창용(야쿠르트)도 일본 진출 이후 2년 동안 61세이브 8홀드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를 특징짓는 유명한 표현 중 하나가 바로 ‘현미경 야구’다. 전력분석원이 세밀히 분석해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고, 일본 투수들은 이렇게 드러난 상대 타자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이종범도 전력분석원의 분석에 당했고, 이병규와 이승엽도 이들의 집요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투수들도 마찬가지다. 투수 폼에서 나오는 사소한 버릇들도 전력분석원에게는 훌륭한 ‘먹잇감’이다. 일본의 ‘닛칸스포츠’는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김태균과 상대한 바 있는 소프트뱅크 소속의 투수 스기우치와 마하라를 통해 김태균에 대한 공략법을 최근 지면에 내보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언론에도 이렇게 일부를 노출할 정도니 팀 내 전력분석 노트에는 얼마나 방대한 양의 자료가 기록돼 있을지 짐작이 간다.
일본 야구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고 외국이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것도 여러 선수가 실패한 원인이다. 언어 문제도 선수들이 적응해내야 할 부분. 요미우리와 한신에서 총 4년간 코치로 있었던 김기태 LG 2군 감독은 “상대 선수들에 대한 분석 없이 일본 무대에 나가기 때문에 초반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본 프로야구의 스트라이크존은 한국 프로야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은 좌우로 넓게 스트라이크를 적용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위아래로 넓게 적용한다. 이런 작은 차이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야구를 했던 투수나 타자들에게는 큰 변화로 느껴졌고, 결국 이에 적응하지 못해 대부분 일본 무대 첫해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승엽은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제구력이 뛰어난 일본 투수들이 한일 간 스트라이크존의 차이를 활용해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오른손 타자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슬라이더가 일품인 선동열도 좌우로 좁아진 첫해에 스트라이크존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했다.
이승엽의 말처럼 일본 투수들은 변화구를 많이 던지고 제구력이 한국 투수들보다 뛰어나다. 한국에서는 많이 볼 수 없던 포크볼 등의 변화구에다 정교한 제구력까지 뒷받침되니 한국 타자들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야구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관건
더욱이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라 해도 일본에서는 ‘외국인 선수’에 불과하다. 국내 야구에서도 그렇듯 팀에서는 외국인 선수에 대해 단기적인 성과를 바라게 마련이고, 단기에 그 성과가 좋지 못하면 2군으로 내려가고 장기계약 불발로 이어진다.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국내에서만큼 많지가 않다. 단기간에 많은 것을 보여주려다 보니 조급해져서 상대 투수들의 전략에 말리고 부상하기도 하는 등 역효과가 적지 않았다.
한국 야구가 최근 국제무대에서 일본 야구를 여러 차례 꺾는 등 대등한 경기를 보여줬지만 실력차는 분명히 있다. 역사가 길고 수준이 더 높은 데서 나오는 차이가 실력으로 반영되는 부분도 한국 선수가 일본에서 부진했던 원인 중 하나다.
어떻게 하면 일본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일본 야구에 대한 공부, 상대 선수들에 대한 준비가 중요하다. 일본 현지에서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적응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먼저 일본 무대에서 뛴 선배들의 경험담도 새겨들어야겠다. 일본 프로무대에서 19년이라는 오랜 기간 활약한 백인천 SBS 스포츠 해설위원은 “내년 시즌부터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는 김태균은 ‘한국의 김태균’이 아닌 ‘지바 롯데의 김태균’이라고 마음먹어야 한다. 야구할 때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범호 역시 예외가 아니다.
김태균은 지바 롯데 입단식에서 “일본 투수들의 투구 영상이 담긴 비디오를 가져와 이미 분석작업을 시작했다. 수준 높은 일본 야구에 진출하기 위해 3년 전부터 일본 야구를 공부하고 준비해왔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지금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한국 프로야구에서만큼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본 프로구단들은 늘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들에게 손짓을 해왔고, 그 선수들은 더 좋은 조건으로 더 큰 무대에서 뛰기 위해 그들의 부름에 응했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들인 김태균과 이범호가 과연 일본 무대에서는 어떤 성적을 거둘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