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은 일본과 더불어 문화 콘텐츠 생산의 최강대국으로 꼽힌다. 명탐정 ‘셜록 홈스’부터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해리 포터’까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불러 모은 작품도 많다. 섬나라 특유의 국민성, 지리적 여건 등 일본과 공통점이 많은 영국이 스토리의 ‘발전소’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을 짚어본다.
시간이 흘러 이사를 앞두고 남편의 책을 정리해보니 ‘반지의 제왕’과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 전집 시리즈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아홉 살이 된 큰아이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푹 빠져서 영화와 책을 보고 또 보고 있다. 지금까지 열거한 책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영국산 콘텐츠라는 점이다.
영국 고대문학에 뿌리 둔 ‘해리 포터’
유럽의 한 귀퉁이에 있는 섬나라, 인구 6000여 만명, 면적 약 24만3000km2의 영국은 강대국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모로 조금 모자란 나라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의 위상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빛이 바랬고, 인구수나 국토의 넓이, 경제규모로도 세계적인 위치는 ‘지는 해’에 가깝다. 그러나 문화 콘텐츠라는 분야로 영역을 좁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국은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제치고 몇 년째 문화수출 1위를 지키는 문화산업 강국이다.
비틀스와 브리티시 록으로 시작된 ‘영국의 문화침공’은 데미언 허스트, 앤서니 곰리, 크리스 오필리 등으로 대표되는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의 현대미술,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카메론 매킨토시 팀의 뮤지컬에 이어 현재문학으로까지 옮겨 붙은 상태다. 요즘 영국의 주력 수출상품은 설명이 필요 없는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이니 말이다. ‘해리 포터’가 출판, 영화, 캐릭터, 관광 등으로 파급력을 넓히며 거둬들인 경제효과가 300조원이 넘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런데 영국산 콘텐츠의 면면을 살펴보면 조금 남다른 점이 있다. 우선 영국이라는 국가의 오래된 전통이 영국산 문화 콘텐츠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섬나라인 지리적 특성과 문화 콘텐츠의 특성 사이에 어떤 함수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서 통산 4억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해리 포터’ 시리즈가 대표적인 경우다.
우리는 흔히 J.K. 롤링이라는 뛰어난 작가가 ‘해리 포터’를 탄생시켰다고 생각하지만, 롤링이 영국이 아닌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태어났다면 ‘해리 포터’ 시리즈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이라는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천재 작가인 것과 롤링의 경우는 분명 다르다.
롤링은 다분히 영국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스코틀랜드 특유의 기담과 전설이 혼합돼 탄생한 작가다(웨일스에서 태어나 잉글랜드의 엑시터대학을 졸업한 롤링이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중 어느 지역 작가인지는 영국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곳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다).
‘해리 포터’의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영국의 고대문학과 연결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 뱀, 늑대인간, 마법 등 많은 모티프는 그리스 신화, 켈트문학, 서사시 베어울프,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등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해리 포터’의 2편인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는 자신이 뱀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데 이 부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 멜람포스가 뱀이 귀를 핥는 순간 마법사로서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부분을 연상시킨다.
또 1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나오는 위대한 마법사 니콜라스 플라멜은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로 실존인물이었다. 이와 함께 ‘해리 포터’ 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난쟁이와 거인, 앨프 등은 모두 켈트 신화의 주요 인물이다. ‘해리 포터’보다 좀더 앞선 판타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는 영국 고대문학과의 연관이 더욱 밀접하다.
‘반지의 제왕’ 작가인 J.R.R. 톨킨은 옥스퍼드대학의 문헌학 교수로 고대 언어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다. 그는 고대 영어로 쓰인 북유럽 신화를 연구하다 땅속에 사는 난쟁이 호빗족의 설화를 알게 됐다. 호빗족의 설화에서 거대한 서사시인 ‘반지의 제왕’이 탄생했다.
한편 톨킨의 옥스퍼드대 동료 교수이던 C.S.루이스는 교수들의 맥주 모임에서 톨킨이 읽어주는 ‘반지의 제왕’ 원고를 듣고 성경과 고대 설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7부작 ‘나니아 연대기’를 썼다. 이처럼 영국의 설화와 영국판 판타지는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고, 소재 고갈에 허덕이던 할리우드는 고대의 설화와 영웅들이 등장하는 신비한 영국판 판타지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울한 날씨 덕분에 추리소설과 아동문학 발달
전통이라는 특징과 함께 영국 콘텐츠의 탄생 배경으로 빼놓을 수 없는 점이 바로 섬나라의 지리적 요인, 그중에서도 날씨다. 북위 55도에 위치한 섬나라인 영국은 연중 200일 이상 비가 오며 늘 흐리고 으슬으슬하다. 특히 가을, 겨울에는 회색빛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는 날씨가 반복된다. 자연히 영국인들은 실내에서 소일하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TV가 등장하기 전까지 집 안에서 여가시간을 보내는 데는 추리소설 같은 가벼운 읽을거리가 최고였던 것이다.
이런 날씨 때문에 영국의 추리소설과 아동문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영국의 추리소설이라 하면 흔히 셜록 홈스나 애거서 크리스티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들보다 일찍 탄생한, 그리고 더 영국적인 추리소설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있다. 그로테스크한 고딕풍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영국의 북쪽이며 또 하나의 영국인 스코틀랜드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스코틀랜드에는 잉글랜드와 또 다른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영국 성공회가 아니라 신교인 장로교를 믿었다. 겨울이면 하루 5시간에 불과한 짧은 낮과 어둡고 음산한 하늘, 엄격한 칼뱅주의의 교리가 늘 스코틀랜드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사람들에 비해 거칠고 불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작가 루이스 스티븐슨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는데, 그의 유모도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다. 유모는 밤마다 어린 스티븐슨에게 ‘믿음 없는 자들이 죽어서 떨어지는 불지옥’을 이야기했다. 그 같은 지옥은 작가에게 두려운 동시에 매혹적인 기억으로 각인됐다. 훗날 스티븐슨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존경받는 신사와 잔인한 살인마가 실은 한 몸이라는 기괴한 설정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썼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기묘한 세계, 현실에 숨겨진 어두운 악몽은 어딘지 모르게 일본의 기담문학을 연상시킨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발표 당시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한 세대 후 런던의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연재된 소설 ‘셜록 홈스’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