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번째 제주 올레길을 걷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것과 같다. 어설픈 아마추어들의 연주가 아니라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프로들의 장엄한 연주 말이다. 잔잔하게 흐르다가 클라이맥스에 가면 장엄하게 울려 퍼지면서 세포 구석구석을 자극하는 감동이라고나 할까. 환상적인 제주 올레 12코스의 후반부, 생이기정 바당길(‘바당’은 바다의 제주 방언)에 서면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가슴을 쾅쾅 울리는 음악이 들릴 것만 같다.
폭발적인 사랑 받는 제주 올레길
‘올레’는 옛 제주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아담하고 작은 길을 부르던 제주 말이지만, 최근에는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만든 트레킹 코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제주올레는 제주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내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올레길은 2007년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교~광치기 해안의 1코스를 시작으로 11코스까지 개발돼 전국의 걷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2007년부터 2008년 말까지 이 길을 다녀간 사람이 3만명이 넘을 정도. 올레길이 이렇게 사랑받는 것은 제주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인 바다와 오름, 계곡과 들판, 꽃과 바람을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올레길이 3월28일 새로운 역사를 쓴다. 198km에 이르는 11개 코스에 이어 12번째 코스를 열기 때문이다. ‘올레’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어느 날, 올레 인터넷 사이트에서 12코스 미리 걷기 행사를 한다는 공지를 우연히 보게 됐다. 감전된 것만 같던 그 순간, 이미 마음은 제주도 돌담길 어드메를 헤매고 있었다.
무릉2리~용수포구 17.6km, 12번째 코스
새로운 12코스 올레길은 서귀포 무릉2리 제주 자연생태문화체험골에서 출발해 녹남봉과 신도 앞바다로 이어지고 이 길은 수월봉, 자구내포구, 당산봉, 생이기정 바당길을 거쳐 용수포구까지 이른다. 총 17.6km. 미리 걷기를 신청한 올레꾼들이 자연생태문화체험골에 모인 시각은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삼삼오오 파란색 화살표를 쫓아 한 걸음씩 걷는다. 길 초반은 무릉2리 마을을 걷는다. 돌담 너머로 보이는 고양이에게 윙크도 한번 보내고 돌담을 감싼 어여쁜 개나리에게도 미소를 짓는다. 몸도 마음도 발걸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그러나 가벼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신도연못이 나타나면서 둑방길을 올라가야 했기 때문. 전날 호우주의보까지 내린 터라 주변은 모두 흙탕물 밭이었다. 트레킹화 밑에는 진흙이 계속 들러붙어 마치 키높이 구두를 신고 걷는 듯했다. 신도연못 구간을 지나 발을 탈탈 털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바닥에 한껏 모았던 신경을 풀어놓으니, 푸른색 마늘밭과 청보리밭이 가슴속으로 쏴하게 스며든다. 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풀들이 계속 물결치며 눕는 바람에 김수영 시인의 ‘풀’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웅얼거려진다.
제주의 푸르름과 아름다움은 녹남봉 위에서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녹남봉은 12코스에 있는 3개의 오름 가운데 하나로, 녹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오름 위에서 보리밭과 마늘밭을 내려다보니 물결치는 푸른 바다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녹남봉 구간은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그래도 평지를 걷다가 오름에 오르니 발가락 사이에 땀이 나기 시작하고 숨도 조금 가슴을 차고 올라왔다. 그런 와중에도 부지런한 올레꾼들은 산속 봄나물 캐는 재미에 빠졌다. 무쳐 먹으면 정말 맛있다며 자신이 캔 나물을 한 움큼씩 나눠주기까지 한다.
기절할 만큼 아름다운 생이기정 바당길
오전에 제주의 들판에 빠져 사색에 잠겼다면, 오후는 제주의 바당에 녹아 황홀함을 만끽할 차례다. 신도 앞바다부터 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 장관을 이룬 수월봉까지는 놀라운 제주 해안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해안길이라고 해서 실크처럼 곱디고운 백사장을 상상하면 안 된다. 울퉁불퉁 까만색 개성 넘치는 현무암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의 다양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화산이 만들어놓은 돌 도구리(불완전한 원형으로 만들어진 제주의 생활용구)도 보인다. 유난히 세게 부는 바람 덕에 물결이 파도치는 도구리 안은 작은 세상 같다.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이국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으랴. 한 올레꾼은 올레길에 있는 식물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몰랐던 나무 이름을 하나 배운다. 한 올레꾼은 다음 사람을 위해 잘 보이는 길가에 파랗고 노란 리본을 매단다. 또 하나 깨닫는다. 뒤에 오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올레길을 나서기 전 궁금했던 것이 표지였다. 도대체 이 화살표가 어떻게 나 있을까, 과연 끊어지지 않고 길을 잘 알려줄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올레에 오르니 이 화살표는 믿음이자 신의 손길이었다. 마음이 불안할 즈음이면 어딘가에 꼭 그렇게 그려져 있었다. 어찌나 고맙고 사랑스럽던지. 이래서 사람들은 올레꾼이라는 말만으로도 마음을 놓게 되는구나 싶었다.
신도 앞바다에 이어지는 수월봉에서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한 바람을 뚫고 자구내포구에 들어서자 “보름에 불리지 안 허영 잘 왔수다”(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잘 왔네요)라는 정겨운 제주 사투리가 들려온다. 올레를 걷는 즐거움 중 하나는 제주 사투리를 많이 듣게 된다는 것. 그만큼 제주도의 속살과 만나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자구내포구를 지나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12코스의 클라이맥스를 만날 시간이니까. 당산봉을 지나 이어지는 생이기정(새가 많은 절벽이라는 뜻. ‘생이’는 새, ‘기정’은 절벽의 제주 방언) 바당길은 제주 토박이 올레꾼들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길이다. 한쪽으로는 푸른 평원이 춤을 추고, 한쪽으로는 이보다 멋진 바다는 없을 것 같은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와랑와랑한 햇살이 비치는 날도, 잿빛이 하늘을 뒤덮는 날도 나름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절정의 길이다. 이구동성으로 서동성 제주올레 사무국장에게 묻는다. 이런 길을 도대체 어떻게 발견했냐고. 돌아오는 답변도 일품이다.
“천운이에요. 길을 만들어가는데 2% 부족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한번은 가던 방향과 반대로 가봤어요. 마지막 코스인 용수포구부터 시작한 거죠. 그랬더니 이런 환상적인 길이 보이더군요. 길도 인생도 똑바로 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죠.”
‘길에 모든 해답이 있다’고 말하는 나였지만, 제주올레 12코스를 걸으면서 한 수 또 배운다. 마지막 지점인 용수포구에 다다를 즈음, 잿빛 하늘에서는 빛 내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리는 이미 후들거리며 힘을 잃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뻐근하게 차오르는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멋진, 아니 최고의 하루’였다고 말하는 수밖에.
폭발적인 사랑 받는 제주 올레길
‘올레’는 옛 제주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아담하고 작은 길을 부르던 제주 말이지만, 최근에는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만든 트레킹 코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제주올레는 제주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내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올레길은 2007년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교~광치기 해안의 1코스를 시작으로 11코스까지 개발돼 전국의 걷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2007년부터 2008년 말까지 이 길을 다녀간 사람이 3만명이 넘을 정도. 올레길이 이렇게 사랑받는 것은 제주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인 바다와 오름, 계곡과 들판, 꽃과 바람을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올레길이 3월28일 새로운 역사를 쓴다. 198km에 이르는 11개 코스에 이어 12번째 코스를 열기 때문이다. ‘올레’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어느 날, 올레 인터넷 사이트에서 12코스 미리 걷기 행사를 한다는 공지를 우연히 보게 됐다. 감전된 것만 같던 그 순간, 이미 마음은 제주도 돌담길 어드메를 헤매고 있었다.
무릉2리~용수포구 17.6km, 12번째 코스
새로운 12코스 올레길은 서귀포 무릉2리 제주 자연생태문화체험골에서 출발해 녹남봉과 신도 앞바다로 이어지고 이 길은 수월봉, 자구내포구, 당산봉, 생이기정 바당길을 거쳐 용수포구까지 이른다. 총 17.6km. 미리 걷기를 신청한 올레꾼들이 자연생태문화체험골에 모인 시각은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삼삼오오 파란색 화살표를 쫓아 한 걸음씩 걷는다. 길 초반은 무릉2리 마을을 걷는다. 돌담 너머로 보이는 고양이에게 윙크도 한번 보내고 돌담을 감싼 어여쁜 개나리에게도 미소를 짓는다. 몸도 마음도 발걸음도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그러나 가벼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신도연못이 나타나면서 둑방길을 올라가야 했기 때문. 전날 호우주의보까지 내린 터라 주변은 모두 흙탕물 밭이었다. 트레킹화 밑에는 진흙이 계속 들러붙어 마치 키높이 구두를 신고 걷는 듯했다. 신도연못 구간을 지나 발을 탈탈 털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바닥에 한껏 모았던 신경을 풀어놓으니, 푸른색 마늘밭과 청보리밭이 가슴속으로 쏴하게 스며든다. 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풀들이 계속 물결치며 눕는 바람에 김수영 시인의 ‘풀’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웅얼거려진다.
꽃과 바다와 오름으로 이어지는 올레길은 제주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기절할 만큼 아름다운 생이기정 바당길
오전에 제주의 들판에 빠져 사색에 잠겼다면, 오후는 제주의 바당에 녹아 황홀함을 만끽할 차례다. 신도 앞바다부터 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 장관을 이룬 수월봉까지는 놀라운 제주 해안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해안길이라고 해서 실크처럼 곱디고운 백사장을 상상하면 안 된다. 울퉁불퉁 까만색 개성 넘치는 현무암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의 다양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화산이 만들어놓은 돌 도구리(불완전한 원형으로 만들어진 제주의 생활용구)도 보인다. 유난히 세게 부는 바람 덕에 물결이 파도치는 도구리 안은 작은 세상 같다.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이국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으랴. 한 올레꾼은 올레길에 있는 식물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몰랐던 나무 이름을 하나 배운다. 한 올레꾼은 다음 사람을 위해 잘 보이는 길가에 파랗고 노란 리본을 매단다. 또 하나 깨닫는다. 뒤에 오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올레길을 나서기 전 궁금했던 것이 표지였다. 도대체 이 화살표가 어떻게 나 있을까, 과연 끊어지지 않고 길을 잘 알려줄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올레에 오르니 이 화살표는 믿음이자 신의 손길이었다. 마음이 불안할 즈음이면 어딘가에 꼭 그렇게 그려져 있었다. 어찌나 고맙고 사랑스럽던지. 이래서 사람들은 올레꾼이라는 말만으로도 마음을 놓게 되는구나 싶었다.
신도 앞바다에 이어지는 수월봉에서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한 바람을 뚫고 자구내포구에 들어서자 “보름에 불리지 안 허영 잘 왔수다”(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잘 왔네요)라는 정겨운 제주 사투리가 들려온다. 올레를 걷는 즐거움 중 하나는 제주 사투리를 많이 듣게 된다는 것. 그만큼 제주도의 속살과 만나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자구내포구를 지나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12코스의 클라이맥스를 만날 시간이니까. 당산봉을 지나 이어지는 생이기정(새가 많은 절벽이라는 뜻. ‘생이’는 새, ‘기정’은 절벽의 제주 방언) 바당길은 제주 토박이 올레꾼들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길이다. 한쪽으로는 푸른 평원이 춤을 추고, 한쪽으로는 이보다 멋진 바다는 없을 것 같은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와랑와랑한 햇살이 비치는 날도, 잿빛이 하늘을 뒤덮는 날도 나름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절정의 길이다. 이구동성으로 서동성 제주올레 사무국장에게 묻는다. 이런 길을 도대체 어떻게 발견했냐고. 돌아오는 답변도 일품이다.
“천운이에요. 길을 만들어가는데 2% 부족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한번은 가던 방향과 반대로 가봤어요. 마지막 코스인 용수포구부터 시작한 거죠. 그랬더니 이런 환상적인 길이 보이더군요. 길도 인생도 똑바로 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죠.”
‘길에 모든 해답이 있다’고 말하는 나였지만, 제주올레 12코스를 걸으면서 한 수 또 배운다. 마지막 지점인 용수포구에 다다를 즈음, 잿빛 하늘에서는 빛 내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리는 이미 후들거리며 힘을 잃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뻐근하게 차오르는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멋진, 아니 최고의 하루’였다고 말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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