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과의 단독 공급 계약을 이끈 ‘드림팀’이 오창테크노파크 내 LG화학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전병희 차장, 함재경 상무, 김명환 전무, 신영준 부장, 곽석환 부장, 서승일 차장(왼쪽부터).
1월30일, 이 쾌거의 산실인 충북 청원군 오창테크노파크 내 LG화학을 찾았다. GM과의 단독 계약을 공식 발표한 이후 처음으로 ‘드림팀’ 전원이 오창에 모인 날이었다. 서울 본사와 대전의 배터리연구소, 오창의 생산기지에서 연구·생산·기획·영업 부서에 각기 속해 일하는 이들은 2년에 걸친 ‘GM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들이다.
2년에 걸친 기선 제압 프로젝트
“기선 제압을 했다는 데 무엇보다 큰 의미를 두고 있어요.”
함재경 중대형전지 사업담당 상무의 일성(一聲)에는 ‘그린카’ 분야에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을 뛰어넘었다는 자부심이 배어났다. 현재 전 세계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시장은 니켈수소 전지가 90% 이상을 차지하는데, 일본이 관련 기술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니켈수소 전지 분야에서 끼어들 자리가 없는 삼성SDI, LG화학 등 국내 업체들은 2000년 이후 리튬이온 기반의 배터리 기술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리튬이온 전지를 둘러싸고 폭발 위험 등 안전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됐다. 2007년 도요타는 신형 하이브리드카에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하기로 했다가 안전성 검증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취소한 바 있다.
LG화학의 이번 계약은 리튬이온 전지에 대한 안전성 논란을 해소하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GM 측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LG화학의 평평한 셀 디자인이 경쟁업체의 실린더 타입의 셀보다 열을 더 잘 분산시키고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것으로 판단해 LG화학을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단독 공급 업체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LG화학이 GM에 공급하는 배터리는 리튬이온폴리머로, 현재 하이브리드카용 배터리 시장을 주도하는 일본의 니켈수소 전지에 비해 50% 이상 높은 출력과 에너지를 공급한다. 또한 배터리가 캔(can)이 아닌 파우치(pouch) 타입으로 평평하고 두께도 매우 얇다(50쪽 사진 참조). 신영준 배터리연구소 부장은 “과거의 캔 타입이 ‘뻥’ 하고 폭발했다면, 파우치 타입은 열이 ‘피식’ 하면서 옆으로 새어나오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리튬이온 셀 200장 이상이 장착된 배터리 패키지는 길이 180cm, 무게 180kg이다. 신 부장은 “망간계 활물질과 세라믹 코팅 분리막 사용, 회로를 통한 능동형 제어 등 노트북 배터리보다 두세 배 많은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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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튬이온 안전성 논란 해소 기여
LG화학이 세계 주요 자동차 메이커가 생산하는 첫 전기자동차라 할 만한 시보레 볼트에 배터리를 공급하기까지 진보적 기술력만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다. 배터리연구소장인 김명환 전무는 “기술팀과 영업, 생산, 기획팀이 힘을 합쳐 GM과의 신뢰 구축을 공고히 한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LG화학이 GM과 인연을 맺은 것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휴대전화, 노트북 등 소형 2차 전지사업에서 경험과 기술을 쌓은 LG화학은 2000년 10월부터 전기자동차용 중대형 전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디트로이트에 미국 시장 공략의 ‘선발대’ 노릇을 할 중대형 전지 연구법인 CPI를 세운다. 2004년 8월에는 미국 에너지부와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3대 자동차 메이커의 컨소시엄인 USABC(US Advanced Battery Consortium)로부터 460만 달러 규모의 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수주해 하이브리드카에 탑재할 고성능 전지 개발 업무를 공동으로 진행한다.
LG화학은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 GM과 2006년 5월부터 단독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GM으로부터 하이브리드카용 배터리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때부터 LG화학의 성실성과 추진력은 GM 측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디트로이트 출장팀이 GM에게서 부족한 점을 지적받으면 곧장 한국에 알려 다음 날 아침까지 솔루션을 마련해 GM을 놀래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7년 2월 GM은 LG화학에 앞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본 업체와 계약을 맺는다. 김 전무는 “GM이 ‘LG화학은 우리의 결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며 “비록 계약에 실패했지만 GM에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서의 믿음을 줬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회상했다.
2007년 3월 GM은 전 세계 배터리업체를 대상으로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개발 업체 선정을 위한 콘퍼런스를 연다. LG화학을 포함해 25개 업체가 응했고, 그해 6월 LG화학은 독일 컨티넨탈사와 미국 A123사의 컨소시엄과 함께 2개 후보 업체로 선발됐다. 경쟁사 컨티넨탈이 매출액 27조원의 자동차 부품회사로 세계 4위 규모를 자랑하는 ‘거물’이라면 LG화학은 자동차업계에선 신생 업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년 반 후 승리는 LG화학의 몫이 된다. ‘승리’에 이르기까지 LG화학 드림팀은 비행시간만 15시간이 넘는 디트로이트까지 10차례 남짓 출장을 떠났다. 신 부장은 “2시간의 회의를 위해 날아간 적도 있고, 디트로이트에서 3주나 머물기도 했다”고 말했다. 드림팀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가면 한국에 남은 멤버들은 더 바빠졌다. 미국 현지에서 새벽 두세 시에도 날아오는 주문 사항을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마련하려면 눈도 못 붙인 채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병희 중대형전지 셀생산 파트장은 “주말은 물론 명절에도 쉬지 못하는 날이 태반이었다”고 말했다.
GM 측도 LG화학의 생산 능력을 점검하기 위해 한국을 자주 찾았다. 서승일 중대형전지 영업팀 북미담당 차장은 “2006년 8월부터 두 달에 한 번꼴로 GM 임원들이 한국을 방문했다”며 “그때마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문 프로그램을 짜느라 혼났다”고 회상했다. GM 측이 서울 본사-대전 연구소-오창 생산기지를 하루 안에 모두 둘러보도록 하기 위해 분 단위까지 쪼개는 일정을 짜야 했다. 지난해 10월 밥 러츠 GM 부회장이 방문했을 때는 그가 묵는 호텔방에 걸린 삼성 파브 TV를 다급하게 LG X캔버스로 바꾸는 해프닝도 있었다. 서 차장은 “LG의 역량을 가능한 한 많이 보여주고, LG에만 집중해달라는 의미였다”고 말했다.
오창테크노파크 내 LG화학 중대형 배터리 생산라인에서 직원들이 GM에 납품할 리튬이온폴리머 배터리를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오르고 미국발(發) 금융위기에서 시작한 세계 경기불황이 짙어지면서 ‘그린카’는 경제 난국을 타개하는 중요 솔루션으로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그린카 육성으로 미국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간 별다른 관심이 없던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도 친환경 자동차 개발 계획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2007년 3월 LG화학이 GM의 배터리 공급 업체 2개 후보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을 때만 해도 아무도 이를 큰 뉴스로 여기지 않았고, GM이 전기자동차를 생산할 의지가 과연 있는지를 의문시하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곽석환 중대형전지 기획팀장은 “우리는 타이밍이 언제냐가 문제지, 각국이 그린카 개발에 적극 나서는 때가 반드시 온다고 내다봤다”고 말했다.
LG화학은 이번 GM 계약건을 발판으로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분야에서 글로벌 1위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2013년까지 1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시장 규모는 2008년 7000억원 수준에서 2012년에는 3조2000억원 수준으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함재경 상무는 “전 세계 자동차 7200만대의 1%가 전기자동차로 바뀐다면 배터리 시장은 전 세계 소형전지 시장의 2배가 된다”면서 이 시장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강조했다. LG화학 드림팀은 “지속적인 기술혁신으로 그린카 분야에서도 ‘코리아 넘버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