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리마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했다가 귀국길에 오른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이 11월24일 미국 LA로 향하는 특별기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때는 이 대통령이 외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11월 말, 장소는 대통령 특별기 안. 이 대통령이 일부 기자들에게 “우리도 미국처럼 은행들이 발행하는 우선주를 40조원 정도 정부에서 매입해주면 은행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높아져 중소기업들에게 돈이 좀 풀릴 것 아니겠냐”고 하자, 먼발치에서 이를 듣던 청와대 박병원 경제수석이 기자들에게 달려와 ‘엠바고(보도유예)’를 걸었다는 게 소문의 골자다.
비슷한 시기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은행 상황이 공적자금을 투입할 만큼 어렵지는 않다”고 말했고, 금융위원회 이종구 상임위원도 “은행들의 경영 현황을 볼 때 공적자금을 투입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했다. 경제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해 은행 공적자금 투입설을 부인하고 있었던 것.
이 때문에 정치권과 금융권에서는 이처럼 민감한 내용을 이 대통령이 언급한 것에 대해 “신중치 못한 발언”이라고 비판하면서 소문의 내용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여기에는 은행계의 구조조정 가능성이 금융권 안팎에서 거론되던 것도 영향을 끼쳤다.
알고 보면 우회적인 방법으로 투입 검토 … 정부 위기대처 능력 한계 드러내
확인 취재 결과 소문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과장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의 ‘발언’ 내용은 이 대통령이 귀국한 지 며칠 후 ‘청와대 관계자’의 이름을 달고 한 통신사 기사를 통해 이미 공개된 상태였다. 청와대에서 익명보도를 전제로 엠바고를 풀어줬다는 것. 그 내용은 이렇다.
“올해 말까지 은행의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등 은행의 자본금 문제를 해결해주려 한다. 한국은행을 통해 은행의 고민을 해결할 몇 가지 조치를 취하려고 한다. 그러면 은행들이 대출을 해주는 데 여유가 생긴다.”
40조원이라는 공적자금 규모나 은행 우선주 매입 등 지원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하지만 정부가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관측을 불러오기에는 충분했다.
현재 정부와 은행권은 모두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 가능성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은행들이 후순위채를 발행하거나 증자를 하면 국책은행과 연기금, 펀드 등을 통해 사들이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공적자금을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정부가 은행에 공적자금 투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주든 뒤로 주든, 주는 것은 주는 것이다.
한 금융전문가는 이에 대해 “국내 은행의 부실규모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부만 혼자 쉬쉬하고 있다”면서 “비슷한 시기에 대통령과 정부부처 관계자의 말이 전혀 다른 것부터가 정부의 경제위기 대처 능력에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