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근처에만 가면 이유도 없이 깜짝깜짝 놀라거나 목을 죄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그가 내 목을 잡고 조르는 듯한 공포감에 휩싸이는가.
“알아서 해오라고 지시해놓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가면 ‘이 정도밖에 안 되냐’고 소리쳐요. 뒤통수에 대고 ‘넌 그래서 안 돼’라며 확인 사살까지 날리죠.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아랫사람만 볶는 것이 정상인가요? 집에서 아내에게 하소연을 자주 하다 보니 다섯 살 된 딸까지 그 부장의 이름을 알아요. 얼마 전에는 동료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 식사를 하다 부장 얘기가 나왔는데 다들 흥분해서 언성이 높아졌죠. 그랬더니 딸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예요. ‘아빠, 전 부당(정 부장) 무서워’라면서 말이에요. 우리 집에선 마마 호환보다 무서운 정 부장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정 부장만 모르는 본인의 사내 별명은 ‘공공의 적’ ‘진상 정’이다.
한편 회사원 유현미(가명·32) 씨는 동료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어려운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면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거나 반대로 불쌍한 척하다가도, 막상 갈등 상황이 생기면 거친 말을 섞어가며 필요 이상으로 거세게 덤벼들기 때문이다. 달콤 살벌하고 변화무쌍한 태도 탓에 그 동료의 별명은 ‘녀똘(여자 돌아이)’과 ‘떨녀(화를 낼 때 몸을 부르르 떤다는 이유로)’.
스포일드 어덜트와의 소심하고도 현명한 공존법-일반편
최근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직장인 9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2.6%가 ‘직장 내에 스포일드 어덜트(Spoiled Adult)가 있다’고 답했다.
‘스포일드 어덜트’는 말 안 듣고 버릇없는 아이 ‘스포일드 차일드(Spoiled Child)’에서 유래한 신조어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고 인성에 문제가 있는 성인을 뜻한다. 이 신조어가 회자되기 전에는 ‘돌아이’ ‘사이코’ 등으로 불렸던 익숙한 인간형이기도 하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괴팍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복종을 명령하는 편집장 미란다(왼쪽)는 적어도 실력은 갖춘 상사였다. 상사의 ‘핵심가치’를 지켜줌으로써 상사와의 기싸움에서 벗어난 앤드리아의 ‘서바이벌 노하우’를 눈여겨볼 만하다.
김양래 휴 신경정신과의 김양래 원장(신경정신과 전문의)은 “‘스포일드 어덜트’는 인격 장애와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이들을 대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되도록 말을 섞지 않는 것”이라고 전했다.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 및 처세 등을 다룬 전문서와 전문가들도 ‘스포일드 어덜트’(특히 상사일 경우)로 인한 스트레스를 피하는 근본적인 대책은 ‘회사를 나가는 것뿐’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직장에 다녀야 하고 그들을 모셔야 하는 대부분의 직장인으로서는 이들에 대처하는 소극적인 방어법이라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직장상사 생존보고서’(위즈덤하우스)를 공동 집필한 최병권 LG경제연구원 인사조직연구실 책임연구원은 ‘스포일드 어덜트’를 다룰 때는 ‘지동설서(指東說西·동쪽을 가리키며 서쪽을 말하다)’의 교훈을 떠올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동설서는 제나라 경공이 사냥감을 잃어버린 책임자, 촉추의 죄를 물어 그의 목을 베려 하자 이를 막으려는 안자가 경공의 경거망동을 지혜로운 방법으로 지적했다는 이야기다. 안자는 경공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촉추 너는 죽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첫째 사냥감을 잃어버렸고, 둘째 군주로 하여금 새나 짐승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만들었으며, 셋째 제후들이 이 얘기를 듣고 우리 임금은 사람보다 새를 더 중시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들은 경공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안자가 돌려서 전한 뜻을 간파하고 촉추를 살려줬다.
최 연구원은 “까다로운 상사에게는 직접적인 방법보다 간접적으로 전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런 상사들이 승승장구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상향평가제도 등의 제도적 장치를 온몸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고현숙 한국코칭센터 대표는 ‘사이코형’ 상사를 대할 때는 일단 상사가 중시하는 핵심가치(매출 달성, 마감시간 등의 목표)를 인정해주는 것이 속 편하다고 조언한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발맞춰주는 것만으로도 화를 누그러뜨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최고경영자(CEO)들의 퍼스널이미지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이주연 플러스이미지랩 팀장은 ‘스포일드 어덜트’의 기질이 미성숙한 아이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괴팍한 성격의 CEO들에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심리테스트를 실시해보면 성격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과 놀랄 만큼 비슷한 결과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성질 나쁜 아이와 같다’고 생각하고 어린아이에게 베풀 듯 너그러운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모두 북폴리오 제공 (‘못된 상사 밑에서 살아남기’에서 발췌)
설문조사 결과와 전문가들의 조언을 참조해보면 스포일드 어덜트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독불장군형’, 감정 조절을 못하고 화를 폭발하는 ‘다혈질형’,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형과 공(功)은 가로채고 과(過)는 미루는 책임전가형을 합친 ‘복합형’, 팀워크를 해치고 조직에 융화하지 못하는 ‘이기주의형’이 그것이다. 앞의 세 가지 유형은 상사, 마지막 유형은 동료나 후배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독불장군형 | 동의어 ‘헤드라이트형’ ‘독단형’ ‘무대포형’ ‘부하직원 억압형’
“그가 상사라면 즐겨 써야 할 레토릭은 ‘As you know(아시다시피)…’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앞만 비추며 달려가는 이들에게 ‘알량한’ 소신을 내세워 ‘NO’를 외치지 말라. 대신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같은 문장을 미리 연습해두자.”(이주연 팀장)
“독불장군을 대할 때 세 가지 원칙은 ‘잘 경청하고, 다시 확인한다며 재질문한 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원칙을 완벽하게 지키는 샐러리맨이 성공적인 성과를 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보다 부하직원의 태도나 표정 때문에 더 크게 화내는 상사가 많다는 뜻이다.”(김양래 전문의)
“이들에게는 ‘존재감 없는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 상책이다. 억압형 상사들은 직위와 권력을 이용해 부하직원들의 의견, 제안을 비난하고 얕잡아보거나 아예 무시한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칭찬의 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비위가 좋다면 공개 석상에서 당신이 해낸 일을 상사의 공으로 돌려도 좋다.”[‘못된 상사 밑에서 살아남기’(북폴리오) 참조]
● 다혈질형 | 동의어 ‘호전형’ ‘돌아이’ ‘사이코’
“인신공격성 발언을 많이 하는 유형이다. ‘겨우 이렇게밖에 못해?’라는 말도 모자라 느닷없이 육두문자를 날린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거나 반대로 눈물을 쏟는 등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것은 미성숙한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행동화(acting-out)다. 상사가 다섯 개를 원한다면 여섯 개를 해줘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김양래)
“나만의 ‘상사 사용 설명서’를 만들어보자. 약간의 반론만 제기해도 ‘나랑 해보자는 거냐’며 덤비는 이들은 자격지심이 많다. 따라서 이들 앞에서는 무장해제하는 것이 철칙이다. ‘당신을 해치지 않아. 나는 당신 편’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양의 탈을 쓴다. ‘당신 말이 맞다’는 맞장구 한마디가 한 달간의 사무실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다.”(이주연)
“폭군형 상사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표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상사가 당신을 괴롭힌다면 처음 당했을 때 곧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냥 참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또다시 공격 표적이 된다. 그들은 약해 보이는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으며, 상대가 참는 것은 약하다는 증거로 본다. 말로 했는데도 또다시 공격해온다면 상사가 그런 행동을 한 날짜, 시간, 장소를 적어둔다. 이들은 누군가가 글로써 자신을 비난하거나 잘못을 추궁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한다.”(‘못된 상사 밑에서 살아남기’ 참조)
● 복합형 | 동의어 ‘표리부동형’ ‘책임전가형’ ‘인간말종’
“내 앞에선 칭찬하고 뒤에서는 욕하는 상사 또는 동료, 후배를 만난다면 반드시 내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물론 태도는 ‘쿨’하고 겸손하게. 상대가 상사라면 ‘저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스킬이 좀 늘어야 덜 힘드실 텐데. 죄송해요’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할 때는 진심 어린 눈빛 등 약간의 연기력이 요구된다. 후배나 동료라면 ‘정말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느냐’고 직접 물어보는 것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이주연)
“표리부동형 인간은 열등감이 많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런 성격이 나타나는 가장 큰 원인은 대상의 통합이 되지 않기 때문. 보통사람들은 개인을 장점과 단점이 통합된 한 대상으로 여기는 반면, 이들은 대인관계의 양상에 따라 칭찬(all good)만 늘어놓다가 갑자기 욕(all bad)을 하는 등 태도가 돌변하는 데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내가 얼마나 상처받고 있는지를 글로 표현해보는 것이 좋다.”(김양래)
“책임전가형 상사 또는 동료와 일한다면 업무일지를 남겨 공과를 분명히 하도록 한다. 말로 보고나 회의하는 일을 줄이고 되도록 문서로 남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회의 같은 공식석상에서 한마디 할 기회가 있을 때면 ‘제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등의 말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간접적으로 만방에 알리자.”
(임성학 멘토링컨설팅연구소장, 화진화장품 이사)
● 개인주의형 | 동의어 ‘자발적 외톨이형’ ‘팀워크지수 제로’ ‘마이웨이형’
“단체 회식이나 모임에 빠지려는 사람에게는 ‘전략적 왕따 수법’을 쓸 수밖에 없다. 회식 약속을 하면서 ‘아, ·#51931;·#51931; 씨는 이런 모임 싫어하지? 나머지는 모두 함께 가는 거죠?’라고 묻고 팀 내 중요 정보들이 모임을 통해 공유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소외감이 든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동참하게 마련이다.”(이주연·김양래)
변화무쌍한 직장,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로 ‘거짓 미소’와 ‘할리우드 액션’을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심지어 ‘거짓 미소’에도 원칙이 있다. 모두 웃으면 따라서 웃어야 하고, 상사가 우스운 말을 하면 반드시 웃어줘야 하며, 남들이 웃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반드시 웃어야 한다는 것이다.[‘21세기 직장생활백서’(새론북스) 참조]
‘비정상’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정상인’들의 행동 강령. 그 안에 처연함이 묻어난다.
‘스포일드 어덜트’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최선책은 회사를 옮기는 것. 여의치 않다면 되도록 부딪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