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쎄, 어쩌면 그 잎이며 푸른빛조차 허황한 장식이고 착시였던 것은 아닐까. 그 절정이 되는 단풍의 작렬하는 오르가슴이 물러서고 나면 나무는 그저 한 줄기의 가느다란 직선이 되고 마는 것인데, 바로 그런 삭막함이나 시선을 막막하게 만들어버리는 앙상함이 오히려 생의 비의(秘義)를 드러내는 듯 보인다. 시인 황지우는 11월의 나무에서 이렇게 썼다.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이하 줄임)
도시민 위한 쉼터 … 궁 안에 들어서면 詩心이 절로

그것이 그러한 까닭은 대체로 고궁이 큰 도시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어느 소도시, 잦은 전쟁의 수비 책략으로 언덕 높은 곳에 지어진 고성이라면 모를까, 동서를 막론하고 고성이든 고궁이든 그것은 역사의 유래가 길고 긴 대도시의 한복판에 자리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우리의 사정에서 보면 너무나 확연하다.
나라 안팎의 현안이 분초를 다투며 진행되는 서울 한복판 세종로, 바로 그 한가운데에 경복궁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면 순식간에 중세나 구한말의 어떤 정한(情恨)으로 귀의하게 되는 것이다.
대도시의 모든 직선은 고궁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고궁만이 오랜 전설을 보유한 듯하다. 또한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듯 고궁은 완만한 유려함으로 버티고 서 있다. 대도시의 숨가쁜 경적은 고궁의 담장을 좀처럼 넘지 못한다. 고궁 안의 소란은 느리게 걷기 위하여 애쓰는 산책자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들뿐이다. 대도시의 날카로운 시선은 고궁으로 들어서면서 저도 모르게 뭉개져버린다. 산책자의 눈은 고궁 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서 오히려 시간의 퇴적층의 위로를 받아 잠시나마 은은하다. 시인 김재진의 넉넉한 마음은 결코 착한 시인만이 누리는 따뜻한 호사가 아니다. 고궁에 들어서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덕수궁이 조선 초기, 2대 임금인 정종 때부터 그 이름이 비롯되고 오늘의 위치와 광경은 세조 때 확립되었으며 그로부터 꽤 오랫동안 사저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후 의주로 피란하였던 선조가 돌아와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이곳을 행궁(行宮)으로 정하고 그 범위와 위용을 넓혀 왕의 거처가 되었으나, 오늘의 덕수궁은 역시 구한말의 고종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구한말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아관으로 파천하거나 그곳에서 돌아오면서 덕수궁 곳곳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덕수궁을 소요할 때 그곳의 많은 지형과 지물은 100여 년 전의 근세사를 압축한 파노라마로 재현된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흔적 곳곳에 남아
덕수궁에 들어선다는 것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들어설 때의 정황과는 조금 다르다. 근정전이나 강녕전이 있는 경복궁, 혹은 인정전이나 대조전이 있는 창덕궁이 왕조 500년의 영화를 보여준다면 석조전이나 중화전의 덕수궁은 중세에서 근세를 넘어서는 과정의 구한말 대한제국을 엿보게 한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런 고궁을 소요하는 것은 지금의 남루하고 작은 도심의 일상들이 저 오랜 역사와 은밀하게 교감을 나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인으로서의 삶은 유한하고 어쩌면 달리 기록할 것도 없는 작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고궁에 들어서면 그런 유한성은 역사와 교감하게 되고, 그 순간 항진하던 시곗바늘이 멈춰 선다. 작은 삶이 큰 세계와 만나면서, 작은 삶의 ‘작은’ 의미가 되새겨지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거대한 뿌리에서 그렸던 것처럼.
전통(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光化門)/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追憶)이/ 있는 한 인간(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