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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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관사가 된 첼리스트 故人들을 위한 마지막 배웅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굿 바이’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입력2008-11-20 13: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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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관사가 된 첼리스트 故人들을 위한 마지막 배웅

    ‘굿’바이’는 영화적으로 평범한 화술을 선사하지만, 관객들을 울고 웃기는 감정의 진폭만큼은 시종일관 귓가를 울리는 첼로의 저음처럼 풍부하다.

    사내는 이제 저승의 문턱에서 이별을 고해야 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이를 악물고 참던 사내는 방금 전 5분이나 늦게 왔다며 염하는 납관사들에게 화를 내던 그 사람이 아니다. 사내는 낮게 읊조린다. “아내는 내가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러고는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싼 요깃거리를 납관사에게 내민다.

    방금 시체를 다뤘던 손으로 두 납관사는 돌아가는 길에 우물우물 곶감을 먹는다. 맛나게.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안스럽게도’ 맛나게. ‘굿’바이’는 납관사라는 특수한 직업을 운명처럼 짊어진 전직 첼리스트, 다이고의 시선을 따라 조용히 삶과 죽음의 경계를 관망한다. 사실 이 영화의 원제목이 ‘배웅’이고 영문 제목 굿바이의 ‘굿’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 그리고 납관사라는 직업조차 모르고 그저 여행 도우미를 한다기에 이 직업의 문을 두드린 주인공의 착각에서도 드러나듯, 영화에서는 죽음을 ‘좋은 이별’ 혹은 어떤 커다란 문에서의 ‘배웅’ 같은 것으로 바라본다.

    여행도우미 뽑는다기에 지원했다 덜컥 엉뚱한 길로

    돌이켜보면 옛날부터 장례식장이나 장의사가 으슥한 구석에 있었던 것도 죽음 자체를 회피하고 싶어하는 우리 마음의 발로였으리라. 영화 역사에서도 죽음의 표현은 흔히 죽은 새의 깃털이나 부러진 가지, 마른 꽃, 밀가루 혹은 눈 같은 만물에 찾아드는 정적인 시각 이미지들로 은유돼왔다. 그러나 ‘굿’바이’에는 죽음에 대한 정면 응시 혹은 도저한 직면이 도드라진다. 그것은 바로 시체를 매개로 해서 어쩔 수 없이 물화돼 우리 앞에 놓이는 죽음 그 자체를 바라보는 직설의 선이다. 1억8000만원짜리 첼로를 샀지만 주인공은 첼로에 묶여 있었다고 느낀다. 재능이 없었다고. 처음 납관 작업을 바라보며 그는 납관사의 섬세하고 절도 있는 동작에서 활을 긋던 자신의 손길 이상의 정중동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얼굴을 매만지는 부드러운 손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애무하는 듯하고, 죽은 이의 살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기운에는 차가운 절도와 감정의 절제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가, 그는 ‘일반적인 일을 하길 바란다’는 아내의 바람이나 죽은 사람을 팔아먹는다는 상주의 비난, 평생 저 사람 같은 일을 하고 살 거냐는 편견에도 아랑곳없이 시신을 닦고, 염을 하고, 화장을 한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남길 수 있는 죽음의 한 예술, 납관에 매혹된 것이다.

    이렇게 정성스런 납관의식을 통해 ‘비밀’ ‘바람의 검, 신선조’를 만들었던 다키타 요지로 감독은 죽음과 맞닿아 있기에 더욱 찬란한 외경, 비밀의 축복인 삶을 부각한다. 처음으로 구더기가 끓는 시신을 염하고 온 날, 다이고는 아내가 저녁식사로 내놓은 닭에서 시체를 먹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심하게 토한 그는 이내 애원하듯 아내의 살아 있는 육체를 탐하려 든다. 그런가 하면 같이 일하는 사무실 여자는 고급 왕실 식기에 차를 마시고, 사장은 식물로 가득한 자신의 방에서 직접 요리를 해먹는다.



    납관사가 된 첼리스트 故人들을 위한 마지막 배웅
    시종일관 귓가 울리는 첼로의 저음 인상적

    영화는 곶감이나 튀긴 닭, 심지어 복어의 정자 주머니까지 손을 빨며 맛나게 먹는 이들의 행동을 통해 더없이 간소한 언어로 죽음처럼 삶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래서 그들은 먹을 때마다 ‘미안스럽게’ 맛나다고 말한다. 죽은 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직 누려야 할 것이 있는 인간들에게는 이 모든 삶이 맛난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상실과 상처로 방황하는 사람의 진물을 만져주는 치유의 기운이 가득하다. 여기에 하얗게 눈이 덮인 설국의 풍광, 야마가타의 풍광 역시 상처의 기억으로 가득한 다이고를 따뜻하게 품어 안는다. 칙칙하지만 소박한 적산가옥들이나 직접 장작불을 지펴서 물을 데우는 낡은 목욕탕 등은 관객으로 하여금 잊고 있고 묻어버렸던 것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대도시의 생활을 버리고 고향으로 회귀한 다이고는 강가에서 문득 보았던 연어처럼, 죽음과 마주 대할지라도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청량감을 느낀다.

    ‘굿’바이’는 영화적으로 평범한 화술을 선사하지만, 관객들을 울고 웃기는 감정의 진폭만큼은 시종일관 귓가를 울리는 첼로의 저음처럼 풍부하다. 올해 몬트리올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 등으로 잘 알려진 히사이시 조가 음악을 담당했다. 아름다운 야마가타의 풍광을 뒤로하고 가슴을 울리는 첼로 연주는 촬영 내내 첼로 연습에 매달렸던 주연 배우 모토키 마사히로가 직접 연주했다. 추신, 영화에서는 돌 편지라는 독특한 설정이 나온다. 그 옛날 문자가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돌 모양으로 서로의 기분을 전했는데, 이것이 상대의 손에 돌을 쥐어주는 돌 편지라고. 이 가을 꼭 한번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고 싶은 새로운 형태의 편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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