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스 한 장으로 수백억원의 돈이 국가와 국가를 넘나들었다면 믿겠는가? 최근 경찰청 외사국 국제범죄수사대는 국가정보원, 인천공항 출입국사무소와 공조해 은행 등을 거치지 않고 업자들과 개인의 자금을 한국과 파키스탄에서 유통한 파키스탄 환치기 조직을 검거했다.
불과 몇 개 조직을 소탕했는데 무려 53명의 조직원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고, 도주한 피의자도 상당수다. 그만큼 중동지역 환치기 조직이 한국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내에서 파키스탄으로 은밀하게 자금을 보내려는 사람에게서 원화를 받고 일정 수수료를 뗀 뒤, 파키스탄에서 돈을 받는 사람에게 현지 화폐로 전달하는 것이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환치기 수법이다.
테러조직 탈레반 자금도 관리
국내 거래든 해외 거래든 돈이라는 것은 은행계좌를 통해 송금되는 것이 상식이다. 세계 각국은 음성적인 외환거래를 막기 위해 은행 외 거래는 불법으로 규정한다. 한국 역시 외환거래법과 관세법 등으로 은행을 거치지 않는 검은돈의 흐름과 그 수법을 강력히 규제하고 있다.
이번에 적발된 조직은 아랍어로 신뢰를 뜻하는 ‘하왈라.’하왈라란 전 세계 조직망을 통해 은행을 통하지 않고 자금을 유통하는 이슬람 전통의 송금 시스템을 말한다. 이 조직은 한국에 무역업체를 차리고 법인 등록까지 한 뒤 불법 외환거래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무장 테러조직인 탈레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자금을 관리한 사실도 밝혀졌다.
하왈라 조직이 수면 위로 드러난 건 7월 경찰이 헤로인 정제원료인 무수초산 12t을 탈레반 점령 지역인 림로즈로 밀수출하려 한 아프가니스탄인 K씨를 검거하고, 또 다른 경로로 밀수출되려던 무수초산 50t을 적발한 것이 발단이다.
무수초산은 한국에선 ℓ당 몇천원이지만 파키스탄에서는 한국 가격의 70~80배 이상 거래되는 마약 제조원료다.
K씨에게서 “탈레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위 두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3개월간 무수초산 구입 자금이 들어온 경로를 역추적했다. 그 결과 친(親)탈레반 지역인 파키스탄 북서변경 주(州) 출신인 I씨가 관리하던 차명계좌에서 K씨 자금 5만 달러가 거래된 흔적이 드러났다.
이후 경찰은 I씨가 직접 관리한 차명계좌 7개와 관련 차명계좌 150여 개를 찾아냈다. I씨는 2000년 10월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온 후 2005년 재차 입국하면서 위장 무역업체를 차리고 환치기에 나섰다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취재 결과 I씨는 아예 노동비자로 입국한 2000년 처음으로 ‘M트레이드 인터내셔널’이라는 섬유·전자제품 수출업 목적의 무역 법인을 차려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 서울 이태원을 중심으로 배후에서 불법 외환거래 작업을 준비했다.
첫 입국 후 5년간은 노동비자로 파키스탄과 한국을 오간 I씨는 2005년 8월엔 일반 비자로 입국했다 10월엔 기업투자 비자로 입국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 경찰 수사에서는 그 이후 I씨가 파키스탄 현지 조직과 공모해 본격적으로 환치기에 나섰으며, 최근까지 수백억원을 관련 계좌를 통해 관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오기덕 수사관은 “확인된 것만 400억원”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들이 한국과 파키스탄에서 자금을 관리해온 수법은 이렇다. 고향의 가족들이나 업자에게 돈을 보내려는 국내 거주 파키스탄 노동자나 개인들이 송금을 의뢰할 경우, 돈을 건네받은 뒤 파키스탄 조직에다 돈을 받는 사람에게 지급하라는 내용의 팩스를 보낸다. 두 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하는 업체들의 결제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담보나 개인 신상에 대한 확인 없이 파키스탄 노동자에게서는 원금의 0.03%, 업체에게서는 2% 정도까지의 송금 수수료를 뗀다. 이는 환율수수료, 송금수수료 등을 내야 하는 은행 송금과 비교하면 부대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것이다.
한국 내 조직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파키스탄 하왈라 조직에서는 현지 화폐로 수취인에게 돈을 건네준다. 결국 이용자로서는 송금 흔적을 남기지 않고도 적은 비용으로 송금 효과를 얻는 셈이다.
수수료 싸고 송금 흔적도 없어 일석이조?
만약 이러한 송금 시스템을 운영하다 한국과 파키스탄 하왈라 조직 사이에 송금액 차이가 날 경우, 즉 한쪽은 입금이 주로 돼 돈이 쌓여가고 한쪽은 지급만 이뤄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이들은 기발한 방법으로 그들 사이의 채권-채무 관계를 상계 처리했다.
예를 들어 한국 내 하왈라 조직이 계속 송금을 요청하고 파키스탄 현지 조직에서는 실제 돈이 인출돼 지급되는 경우가 많아 한국 조직이 채무를 지고 있다면, 한국 조직은 채무 금액에 해당하는 불도저, 포클레인 등 중고 중장비를 구매해 파키스탄 현지 수입업자에게 보낸다. 그러면 이 업자가 파키스탄 하왈라 조직에 돈을 지불하게 되고, 결국 채권채무 관계는 상계 처리되는 것이다. 두 조직 사이에서는 이른바 물건으로 ‘퉁’을 쳐 빚을 갚는 ‘땡처리’가 이뤄지는 셈이다.
하왈라 조직은 파키스탄 수입업자들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수입 물품 가격을 낮게 신고하는 불법 과정에서도 적절하게 이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 수출업자에게서 물건을 수입한 파키스탄 수입업자는 정상적인 수출 가격으로 세관에 신고할 경우 그 품목에 높은 관세를 물게 된다. 이 때문에 수입업자들은 수출 가격의 일부를 달러로 수출업자에게 바로 주고, 나머지는 하왈라 조직을 통해 현금으로 주겠다고 한 뒤 물품 가격을 낮게 신고하는 것이다.
대대적인 환치기로 I씨가 얻은 수입은 10억원 정도로 경찰은 보고 있다. 오 수사관은 “파키스탄에서 노동자 월급이 우리 돈으로 6만원 수준임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돈”이라고 전했다.
I씨가 이 수입을 어디에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 내 재산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오 수사관은 “I씨 집을 압수 수색했지만 미리 정보를 입수했는지 집 내부를 정리해놓고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며 오히려 태연하게 나오더라”고 말했다.
경찰, 국정원 등 유관 기관은 이 밖에 경기북부지역 하왈라 조직원 검거 현장에서 파키스탄 내 60여 개 지역의 하왈라 조직 명부를 압수하기도 했다.
오 수사관은 “수사 중인 사안이라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I씨 관련 계좌에서 계속 범죄혐의가 발견되고 있다”고 전했다.
불과 몇 개 조직을 소탕했는데 무려 53명의 조직원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고, 도주한 피의자도 상당수다. 그만큼 중동지역 환치기 조직이 한국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내에서 파키스탄으로 은밀하게 자금을 보내려는 사람에게서 원화를 받고 일정 수수료를 뗀 뒤, 파키스탄에서 돈을 받는 사람에게 현지 화폐로 전달하는 것이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환치기 수법이다.
테러조직 탈레반 자금도 관리
파키스탄 하왈라 조직원이 입금된 돈을 확인하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이번에 적발된 조직은 아랍어로 신뢰를 뜻하는 ‘하왈라.’하왈라란 전 세계 조직망을 통해 은행을 통하지 않고 자금을 유통하는 이슬람 전통의 송금 시스템을 말한다. 이 조직은 한국에 무역업체를 차리고 법인 등록까지 한 뒤 불법 외환거래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무장 테러조직인 탈레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자금을 관리한 사실도 밝혀졌다.
하왈라 조직이 수면 위로 드러난 건 7월 경찰이 헤로인 정제원료인 무수초산 12t을 탈레반 점령 지역인 림로즈로 밀수출하려 한 아프가니스탄인 K씨를 검거하고, 또 다른 경로로 밀수출되려던 무수초산 50t을 적발한 것이 발단이다.
무수초산은 한국에선 ℓ당 몇천원이지만 파키스탄에서는 한국 가격의 70~80배 이상 거래되는 마약 제조원료다.
K씨에게서 “탈레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위 두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3개월간 무수초산 구입 자금이 들어온 경로를 역추적했다. 그 결과 친(親)탈레반 지역인 파키스탄 북서변경 주(州) 출신인 I씨가 관리하던 차명계좌에서 K씨 자금 5만 달러가 거래된 흔적이 드러났다.
이후 경찰은 I씨가 직접 관리한 차명계좌 7개와 관련 차명계좌 150여 개를 찾아냈다. I씨는 2000년 10월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온 후 2005년 재차 입국하면서 위장 무역업체를 차리고 환치기에 나섰다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취재 결과 I씨는 아예 노동비자로 입국한 2000년 처음으로 ‘M트레이드 인터내셔널’이라는 섬유·전자제품 수출업 목적의 무역 법인을 차려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 서울 이태원을 중심으로 배후에서 불법 외환거래 작업을 준비했다.
첫 입국 후 5년간은 노동비자로 파키스탄과 한국을 오간 I씨는 2005년 8월엔 일반 비자로 입국했다 10월엔 기업투자 비자로 입국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 경찰 수사에서는 그 이후 I씨가 파키스탄 현지 조직과 공모해 본격적으로 환치기에 나섰으며, 최근까지 수백억원을 관련 계좌를 통해 관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오기덕 수사관은 “확인된 것만 400억원”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들이 한국과 파키스탄에서 자금을 관리해온 수법은 이렇다. 고향의 가족들이나 업자에게 돈을 보내려는 국내 거주 파키스탄 노동자나 개인들이 송금을 의뢰할 경우, 돈을 건네받은 뒤 파키스탄 조직에다 돈을 받는 사람에게 지급하라는 내용의 팩스를 보낸다. 두 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하는 업체들의 결제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담보나 개인 신상에 대한 확인 없이 파키스탄 노동자에게서는 원금의 0.03%, 업체에게서는 2% 정도까지의 송금 수수료를 뗀다. 이는 환율수수료, 송금수수료 등을 내야 하는 은행 송금과 비교하면 부대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것이다.
한국 내 조직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파키스탄 하왈라 조직에서는 현지 화폐로 수취인에게 돈을 건네준다. 결국 이용자로서는 송금 흔적을 남기지 않고도 적은 비용으로 송금 효과를 얻는 셈이다.
수수료 싸고 송금 흔적도 없어 일석이조?
아프가니스탄으로 밀수출되려던 무수초산. 경찰이 밀수출 직전 압수했다.
예를 들어 한국 내 하왈라 조직이 계속 송금을 요청하고 파키스탄 현지 조직에서는 실제 돈이 인출돼 지급되는 경우가 많아 한국 조직이 채무를 지고 있다면, 한국 조직은 채무 금액에 해당하는 불도저, 포클레인 등 중고 중장비를 구매해 파키스탄 현지 수입업자에게 보낸다. 그러면 이 업자가 파키스탄 하왈라 조직에 돈을 지불하게 되고, 결국 채권채무 관계는 상계 처리되는 것이다. 두 조직 사이에서는 이른바 물건으로 ‘퉁’을 쳐 빚을 갚는 ‘땡처리’가 이뤄지는 셈이다.
하왈라 조직은 파키스탄 수입업자들이 관세를 피하기 위해 수입 물품 가격을 낮게 신고하는 불법 과정에서도 적절하게 이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 수출업자에게서 물건을 수입한 파키스탄 수입업자는 정상적인 수출 가격으로 세관에 신고할 경우 그 품목에 높은 관세를 물게 된다. 이 때문에 수입업자들은 수출 가격의 일부를 달러로 수출업자에게 바로 주고, 나머지는 하왈라 조직을 통해 현금으로 주겠다고 한 뒤 물품 가격을 낮게 신고하는 것이다.
대대적인 환치기로 I씨가 얻은 수입은 10억원 정도로 경찰은 보고 있다. 오 수사관은 “파키스탄에서 노동자 월급이 우리 돈으로 6만원 수준임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돈”이라고 전했다.
I씨가 이 수입을 어디에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 내 재산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오 수사관은 “I씨 집을 압수 수색했지만 미리 정보를 입수했는지 집 내부를 정리해놓고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며 오히려 태연하게 나오더라”고 말했다.
경찰, 국정원 등 유관 기관은 이 밖에 경기북부지역 하왈라 조직원 검거 현장에서 파키스탄 내 60여 개 지역의 하왈라 조직 명부를 압수하기도 했다.
오 수사관은 “수사 중인 사안이라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I씨 관련 계좌에서 계속 범죄혐의가 발견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