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나운서 양성기관에서 KBS 시험에 대비해 실력을 다지고 있는 아나운서 지망생들.
얼마 전 KBS가 2009년 신입사원 공채에 아나운서 카메라테스트 복장을 청바지와 면 티셔츠로 규정해 화제가 됐다. KBS 측은 이러한 규정에 대해 “지원자들이 과도한 의상 구매 비용을 부담하던 문제를 해소하고, 의상 등의 외부적인 요소보다 아나운서의 기본 자질과 전문성 등 발전 가능성에 좀더 중점을 두어 평가하고자 하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10월 중순, 이 같은 공고가 나가자 방송사에는 아나운서 지망생들의 문의가 쇄도했다. KBS 인사 관계자는 “(인사공고가 나간) 첫 주에는 50~60통의 문의 e메일과 하루 10건 이상의 전화가 왔다”면서 “지원자들이 (카메라테스트 때문에) 화려한 복장을 구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 만큼 평상복을 입고 오면 무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학원·의상·메이크업 비용 만만찮아
“‘칼라가 있는 옷도 되냐’ ‘면 블라우스는 가능하냐’ ‘구두는 어떤 걸 신어야 하느냐’ 등 다양한 질문이 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본인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고 봅니다. 단, 몸매가 드러나기 쉬운 청바지가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있어서 면바지까지 허용하는 것으로 다시 공고를 내보냈습니다.”(KBS 인사운영팀 관계자)
KBS의 이러한 방침에 대해 아나운서 지원자들은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 포털 사이트의 언론사 입사 정보공유 카페에는 ‘의상 때문에 고민했는데 다행이다. 환영한다’ ‘머리와 화장 부담도 줄면 좋겠다’는 의견이 다수 올라왔다. 하지만 한편으론 ‘취지는 이해하지만 갑작스런 발표에 당황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흰 티에 면바지가) 획기적인가요? 개인적으로는 더 고민스럽네요. (중략) 하체가 ‘건강한’ 저로서는 그냥 치마가 좋은데…. 화장과 머리 스타일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거품을 빼고 카메라테스트를 하겠다는 의도는 알겠는데 당황스러우면서 카테(카메라테스트) 당일 다들 어떻게 하고 오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머릿속이 괜히 복잡해지네요.”(다음 포털 ‘언론인을 꿈꾸는 카페-아랑’ ID ‘jeen’)
이런 불안감 때문일까. KBS의 새로운 복장 규정이 발표된 지 얼마 안 돼 일부 업체에서는 50만원 가까이 되는 면티와 청바지 맞춤옷을 판매하고 있다. 업체 관계자는 “반응이 좋은 편이다. 시험이 일주일 남짓 남은 상황에도 여러 건씩 계속해서 예약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나운서 준비생들이 이렇듯 의상에 신경 쓰는 이유는 높은 경쟁률과 이미지를 우선시하는 시험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1년에 한 번 있는 지상파 방송사 아나운서 공채에 지원하는 수는 남녀 합쳐 1500~2500명. 아나운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해가 거듭될수록 지원자 수도 늘고 있다(한 예로 올해 4명을 뽑는 KBS는 여성 1100명, 남성 400명이 지원했으며, ‘1~2명 뽑을 것’이란 소문이 도는 MBC는 여성 1900명, 남성 600명 정도가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나운서 시험은 1차 카메라테스트와 필기시험, 2차 카메라테스트와 면접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카메라 앞에 서서 20~30초 길이의 뉴스 2~3문장을 읽는 1차 카메라테스트에서 응시자의 70~80%가 걸러진다. 이 1차 시험 통과 경쟁률만 10:1~15:1에 이르러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1차 시험이 가장 어렵다”는 말이 돌 정도.
짧은 시간, 제한된 틀 속에서 강하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의상이나 헤어, 메이크업에 투자되는 비용이 많다. 아나운서 맞춤정장은 보통 50만~70만원대, 유명 디자이너 부티크의 의상은 100만원이 넘는다. 거기에 시험을 치를 때마다 10만~30만원대의 헤어, 메이크업을 받는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활약하는 인기 아나운서들.
2년째 아나운서 시험을 보고 있다는 김모(26) 씨는 “아나운서의 경우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면서 “‘과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시험 특성상 다들 그렇게 하니까 어쩔 수 없다. 아나운서 준비한다고 하면 무조건 ‘된장녀’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억울하다”고 말했다.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갖춰야 할 것은 의상만이 아니다. 대부분은 방송국 입사 전 아나운서 양성기관을 통해 기본 실력을 다진다. 최근 방송국의 신입 아나운서들은 대부분 이러한 양성기관을 1~2곳 이상씩 거쳤다. 일주일에 2~3회씩 2~3개월 과정으로 이뤄진 아나운서 학원의 커리큘럼에는 발음교정과 뉴스 낭독 같은 기본에서부터 이미지 메이킹, 공채면접 대비 개인기 준비실습까지 포함돼 있다. 보통 이러한 과정으로 이뤄진 초급-중급-심화(고급) 코스를 밟고 발성발음반, 공채 대비 특별반 등의 강의를 추가로 듣기도 한다. 한 강의당 수강료는 적게는 월 40만~50만원(주 2회 기준)에서 많게는 200만원에 이르지만 정확한 기준은 없다.
한 앵커 출신 유명 방송인의 경우 한 회당 100만원에 이르는 일대일 강좌를 열었는데 고가임에도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는 소문 때문에 상담 요청이 밀렸다고 한다. 앞서 한 학원에서 3개 코스의 강의를 듣고 현재 케이블 방송국에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한 아나운서 준비생은 공채를 앞두고 “현재 다른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면서 “(예전 학원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걸 알지만 합격자가 많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가게 된다”고 말했다.
케이블·지방 방송국으로 우회 전략 시도하기도
MBC 신입 아나운서 카메라테스트 모습.
그러나 이렇듯 완벽해 보이는 준비에도 공채 아나운서의 행운을 거머쥐는 이는 한 해 10명 남짓. 더욱이 올해의 경우 SBS는 신입 아나운서를 채용하지 않은 데다 나머지 방송사들도 채용인원을 대폭 줄인 상태다.
20여 년간 아나운서 교육을 해온 한 아나운서 교육기관의 대표는 “이 이상은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망생도 그해 방송사가 추구하는 이미지에 안 맞으면 떨어질 때가 있다”면서 “그만큼 운도 많이 따라야 하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20대 초중반부터 아나운서 준비를 시작한 상당수는 재수, 삼수를 거듭하며 공채를 준비하고, 일부는 케이블 방송국과 지방방송국 아나운서,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활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상파 3사와 대형 케이블 방송국을 제외하고 아나운서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다 보니 근무환경이나 처우조건이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특히 여성 아나운서는 계약직이 대부분.
3년째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박모(26) 씨는 “채용 계획이 없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떨어졌을 때만큼이나 절망스럽다”면서 “차라리 한 해 1000명을 뽑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고 말했다.
“입사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 시험이 마약 같다고 해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회사에 들어가서도 미련을 못 버리고 나와 다시 응시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거든요. 다른 시험처럼 확실히 점수가 드러나거나, 내가 왜 떨어졌는지 알면 포기할 텐데…. 그러다 보면 이번 한 번만 더 해보자는 심정으로 다시 시험을 보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