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풀럼축구장을 찾은 현지 어린이들.
K박사는 이런 문화 행사를 통해 마케팅 활동을 펼치는 LG전자의 감성적 접근법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현지에서 확인했다. 현지 소비자들은 한결같이 “LG전자는 고급스러운 제품을 만드는 세계 일류 전자업체”라고 대답했다. 러시아의 마케팅 전문가들은 “러시아 경제가 어려울 때 일본 기업들은 철수한 반면 LG전자는 지속적으로 투자해 신뢰를 쌓았다”면서 “LG전자는 애프터서비스에서도 단연 앞서 믿을 만한 업체”라고 말했다.
영국에 유학 중인 대학원생 S씨는 영국인 친구가 새로 산 휴대전화를 갖고 와 “디자인이 환상적으로 아름답고 기능도 좋다”고 자랑하기에 브랜드를 봤더니 LG전자의 ‘프라다폰’이었다고 한다. S씨는 “한국의 대표적인 회사인 LG전자에서 생산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영국인 친구는 “우리 집 TV도 LG 것”이라 덧붙였다. S씨는 유럽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첨단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LG전자가 한국 기업인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하지 않는 모든 활동은 ‘낭비’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하면서 이같이 일갈했다. 이에 따라 ‘낭비제거 활동’과 ‘일 잘하는 법’ 등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남 부회장은 고객에게 더 높은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고객이 말도 못하고, 표현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는 것을 찾아내 상품화할 것”이라면서 “LG전자 브랜드가 소비자 마음속에 단순히 품질이나 성능이 좋다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와닿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품질·성능·감성 브랜드로 소비자 사로잡아
런던 피커딜리 광장의 LG 전광판(왼쪽), 구인회 LG 창업회장.
이에 앞서 추진한 왕성한 R·D 활동으로 재미를 봤다.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경영진의 결단과 첨단제품을 개발한 연구요원들의 열정이 어우러진 결과물인 블랙라벨 시리즈 휴대전화가 세계적인 히트 상품으로 떠오른 것. 2008년은 블랙라벨 시리즈의 판매기록이 잇따라 경신된 해다. 2005년 11월 블랙라벨 첫 제품으로 내놓은 초콜릿폰이 한국산 휴대전화로서는 최초로 세계 판매량 1800만개 기록을 세웠다. 스테인리스 소재로 감성을 표현한 블랙라벨 시리즈 두 번째 모델 샤인폰은 700만개 판매를 돌파했다. 또 2006년 말 제품이 공개되면서 전 세계 누리꾼(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프라다폰이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 이어 한국에서도 시판되면서 명품 휴대전화 시대를 주도했다.
미국 홈데포 매장의 트롬 세탁기(왼쪽), 명품 휴대전화 시대를 연 ‘프라다폰’의 후속 모델 ‘프라다 2’.
LG전자는 2004년 1월 ‘글로벌 톱 3’를 달성한다는 비전을 세웠다.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확실한 1등 제품과 1등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당시 세계 전자업계는 경쟁심화, 공급과잉, 가격하락, 수익성 저하 등 악순환으로 고전할 때였다. 특히 디스플레이 분야는 공급 물량이 넘쳐 가격이 폭락했다. LG전자는 고급 제품을 생산해서 난국을 돌파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싱글스캔 방식의 42인치 HD급 PDP 모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HDR 기능이 내장된 X-캔버스는 감상만 하던 기존 TV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덕분에 LG전자는 2006년 3월 TV 누적 생산량 2억 대를 돌파하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디지털 TV와 함께 LG전자의 승부 사업인 휴대전화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2005년 2월엔 대규모 통합 단말연구소를 세웠다. 또 휴대전화를 생산하던 서울, 청주 기지를 평택 디지털 파크에 통합했다.
디자인과 글로벌 경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전략이었다. LG전자는 2006년 6월15일 ‘디자인 경영’을 선포했다. 디자인을 통해 회사의 도약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글로벌 경영을 위해 현지화 전략에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 공장을 증설하는 한편, 폴란드 브로츠와프 공장을 유럽 시장을 위한 생산거점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LG전자는 이미 사업의 80% 이상을 해외에서 벌이고 있는 만큼 ‘LG’ 브랜드를 세계적인 명품(프리미엄) 브랜드로 키우는 데 역점을 두기로 했다.
LG전자의 글로벌 경영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0월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에 생산법인을 세운 것. 미국 앨라배마 주 헌츠빌이었다. 공장 설립단계에서부터 줄곧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모은 헌츠빌 공장의 성공 사례는 하버드대에서 교재로 삼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성공을 계기로 해외 진출을 확대했는데 현재는 해외 현지법인이 82개에 이른다. 이는 다른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에도 큰 자극제가 됐다.
1995년 LG전자가 미국 최대 가전업체인 제니스를 인수한 것은 세계 인수합병(M·A) 역사에도 기록될 만큼 주목을 끌었다. 제니스는 미국의 자존심이 담긴 전통 깊은 회사였다. LG전자가 라디오를 만들며 창업하던 1950년대 후반에만 해도 제니스는 막강한 기술력과 자본력을 자랑했다. LG전자의 창업 멤버들은 훗날 이런 M·A가 이뤄질 줄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제니스는 10여 년간의 구조조정 작업 끝에 올해 9000만 달러의 디지털 TV 로열티를 받는 효자 회사로 거듭났다.
글로벌 경영을 위한 충격적인 요법 가운데 하나는 영어 공용어화 프로젝트다. LG전자는 2005년에 “3년 후부터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영어로 하겠다”며 사내 인트라넷을 영어로 바꿨다. 올해는 영어 공용어화 원년이 된다. 외국인이 단 한 명만 끼여 있어도 회의는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 모든 문서는 영문으로 작성된다. 외국인 임직원 숫자도 급증했다. 외국계 회사에서 스카우트해 온 인력은 상무급만도 20여 명이다. 올 2월엔 미국 IBM에서 20년 동안 근무한 토머스 린턴 씨를 최고구매책임자(CPO)로 영입했다.
서울 여의도에 자리한 LG그룹 본사 쌍둥이빌딩(왼쪽), 샤인리오스 냉장고.
LG전자는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에너지 솔루션 사업을 키운다. 화석 연료가 고갈될 때를 대비한 대체에너지 개발사업은 전 세계 일류기업의 ‘로망’ 아닌가. 지열, 풍력, 태양열, 바이오 등 신재생 에너지사업의 국내 시장규모는 올해 2300억원에서 2010년엔 4200억원, 그 후에는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10년 750억 달러에서 2030년엔 2조5000억 달러로 커질 전망이다.
LG전자는 지난 40년간 쌓은 에어컨 공조기술 등을 바탕으로 에너지 관련 기술을 심화시킨다. 이를 위해 R·D 인력을 2007년 1200명에서 2010년 2100명으로, 엔지니어링 영업인력을 2007년 2800명에서 2010년 40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R·D 투자액은 향후 3년간 2200억원 규모다.
이영하 LG전자 디지털 어플라이언스 사업본부장은 “에어컨 기술력과 에너지 솔루션을 연계한 신사업을 발굴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급부상하는 에너지, 친환경 이슈에 적극 대응할 것”이라 밝혔다.
‘기업은 사람이다’ 인재 경영에도 박차
또 다른 차세대 신성장 사업은 ‘자동차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 부문. 정보(information)와 오락(entertainment)의 합성어인 인포테인먼트는 자동차에서 지리 정보뿐 아니라 오락 기능을 제공하는 장치다. 현대자동차에 2002년부터 텔레매틱스를 공급한 것을 인연으로 현대·기아차와 손잡고 이 분야에 본격 진출한다.
LG전자의 올 3분기 글로벌 기준 실적은 매출 12조90억원, 영업이익 5705억원이었다. 휴대전화의 경우 매출액이 3조5141억원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41% 늘었으나, 물량 기준으로는 인도에서의 판매 부진으로 2분기 2770만 대보다 줄어든 2300만 대로 나타났다. 디스플레이 사업은 매출 3조8521억원, 영업이익 160억원으로 흑자기조를 이어갔다. 평판 TV와 PDP 모듈 판매량이 꾸준히 늘어난 덕이다.
LG전자는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신봉한다. 우수 인재를 끊임없이 영입해야 미래가 있다는 점을 절감한다. 이희국 기술책임자(CTO) 등 기술 경영진은 국내외에서 열리는 기술세미나에 수시로 참석해 우수 인력을 찾는다. 맞춤형 인재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해외 주요 대학의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인턴십 프로그램인 ‘디지털 리더 캠프’를 운용한다. 인사팀장 강돈형 상무는 “핵심 인재는 장소, 국적을 불문하고 직접 찾아가 모셔오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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