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병설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능은 영향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매사를 시시콜콜 챙기는 만기총람(萬機總攬)형 리더였다. 뉴스 릴리즈를 장악한 조선방송중앙위원회가 김 위원장에게 내용을 보고한 뒤 가필받는 사안만 연 900건이 넘었다. 김 위원장이 보고를 받는 형태는 ①대면(직보) ②서류 ③모사(팩스) ④구두로 나뉜다. 대면보고의 면담시간이 5분이냐 10분이냐에 따라 ‘총애 위력’을 따지는 측근 간 경쟁도 있었다.
혁명가계승계 vs 혁명정통승계그런데 2006년부터 대면보고를 최소화할 만큼 “(김 위원장이) 지쳤다”는 첩보가 나돌았다. 직접 결재하는 사안이 크게 줄었다는 것. 어느 지도자라도 모든 사안을 혼자 다루기 어렵다는 점에서 직접 결재가 줄어든 의미를 축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 명의의 결정’ ‘중요 부문의 일’에서까지 위임이 나타났다는 첩보는 주목할 만하다. 정보 관계자 A씨는 이를 이렇게 분석한다.
“크게 넷으로 따져볼 수 있다. 먼저 권한 위임 실험에 들어갔다고 분석할 수 있다. 건강문제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큰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도 볼 수 있다. 끝으로 후계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평양 사정에 정통한 정보 관계자 B씨의 관측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평양서 사실상 위임통치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 해군분석센터(CNA) 켄 고스 해외지도자 연구담당 국장은 새로운 실력자의 부상 혹은 집단지도체제의 등장을 강조하면서 국방위원회의 구실에 주목한다.
“현철해(인민군 총정치국 상무부국장) 박재경(인민무력부 부부장) 이명수(국방위원회 행정국장)를 승진시키면서 비공식 권력 핵심을 제도화했다. 역할이 모호하던 국방위원회도 김 위원장의 개인 기구로 제도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지도부 개편은 최고지도자 사후에 대비한 지휘 및 통제 체제를 능률적으로 만들었다.”
복수의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국방위원회는 지난해 2월부터 조직 정비에 나섰다. 역할이 모호하던 조직에 힘이 실리면서 권력지도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위원장 유고 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이 조직의 업무를 총괄하면서 새 지도부 탄생에 일정한 임무를 수행하리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 위원장은 1942년 2월16일생. 후계구도를 정리할 시기가 다가왔다. “아직 없다”와 “준비되고 있다”가 엇갈리지만 다수의 전문가는 김 위원장이 후계자를 결정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3대 세습보다 집단지도체제가 유력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의 후계구도는 ‘혁명승계’라는 개념으로 봐야 하는데, 이는 ‘혁명가계승계’와 ‘혁명정통승계’로 나뉜다. 혁명가계승계는 ‘삼대(三代) 계승’을 대전제로 삼는 반면, 혁명정통승계는 정통성만 있으면 된다는 것으로 ‘가계 세습’을 저어하는 의미가 강하다. | |
“북한 인사 망명 땐 후계구도 정리”북한의 후계구도는 ‘혁명승계’라는 개념으로 봐야 하는데, 이는 ‘혁명가계승계’와 ‘혁명정통승계’로 나뉜다. 혁명가계승계는 ‘삼대(三代) 계승’을 대전제로 삼는 반면, 혁명정통승계는 정통성만 있으면 된다는 것으로 ‘가계 세습’을 저어하는 의미가 강하다.
혁명가계승계의 대상자는 김정남(37) 김정철(27) 김정운(25)이다. 성혜림 소생의 김정남은 ‘후계자의 모친(母親)’을 강조하는 ‘어머니 조국’이라는 개념에서 밀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월북자 출신의 이혼녀로 서방에 망명 시도까지 한 생모’라는 배경이 걸림돌이라는 것. 따라서 정철 정운 형제로 후계구도가 압축됐으며, 김정철이 다소 앞서 나간다는 평가가 정설이었다. 그러나 “고영희가 암으로 사망한(2004년 5월) 뒤 후계구도가 불투명해졌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김정남과 이복동생들 사이 또는 그들을 등에 업은 세력 간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는 설(說)을 정보기관이 파악했으며, 김정남이 세력화에 나선다면 권력투쟁이 엄청나리라는 전망도 제기됐다.
북한의 위임통치는 바로 이 후계구도와 맞물려서도 해석된다.
‘혁명정통’과 ‘혁명가계’를 아우르는 인사가 권좌에 오르리라는 관측이 있는데, 첩보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의 생모인 강반석 가계인 강○○(실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50세 안팎)는 원수 칭호를 듣는 군 원로 이을설(87)의 부관 출신으로 군 장성이라고 한다. 지난해 초부터 국방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으며 굵직한 사안을 그가 결정한다고 한다. ‘혁명정통’과 ‘혁명가계’를 아우르는 이로는 강○○을 비롯해 한국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김 위원장의 외가 인사와 사위들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본처 김영숙이 낳은 맏딸 설송의 남편이 누구인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이 잘 모르는 인물이 후계자로 올라설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이 실험하는 다양한 후계구도 가운데 몇몇을 조만간 보게 될 것 같다. 늦어도 2010년까지는 후계구도가 등장할 것이다.”(대북소식통 K씨)
3대 계승으로 이어지든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든 새로운 인물이 추대되든 간에 그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 정권의 특성상 후계자 경쟁에서 도태한 인사를 지지한 세력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대 방귀깨나 뀌는 북한 인사의 망명 사건이 일어나면 후계구도가 정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정보 관계자 B씨는 말했다. 평양은 ‘김정일 와병설’에도 평온한 듯하지만, 물밑에선 신변의 안위가 달린 ‘후계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김 위원장 주도의 위임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2008년 9월 북한 정세 ‘7문7답’
측근들 충성 맹세 겉은 평온 … 북한 급변사태 철저 대비를
| ◎ Q1.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을 두고 여러 ‘설’이 많은데, 현재 그의 건강상태는 어떻다고 봐야 하나요. |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정권 수립 6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9·9절 열병식에 그가 나타나지 않은 점, 중국과 프랑스 의사들이 8월에 북한에 들어간 점이 그 증거입니다. 국가정보원도 이례적으로 국회에서 ‘김 위원장이 뇌출혈로 수술을 받은 뒤 회복 중’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그의 건강 이상설을 부인했고, 조총련계 ‘조선신보’도 김 위원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북-미 핵협상 때문이라고 주장해 좀더 지켜볼 여지는 있습니다.”
◎ Q2.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에도 북한 권력집단이 동요하는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뭔가요. |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집권 60여 년 동안 이른바 ‘측근’으로 불리는 권력 엘리트들을 단속하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일반 인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특권을 부여한 대신 절대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배신자를 찾아내 숙청하기 위해 통제와 감시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측근들을 한동네에 살게 하고 국가안전보위부 등을 동원해 감시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토록 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아파도 이 시스템은 살아 있습니다. 측근들은 김 위원장이 일어나 자신이 누워 있는 동안 ‘이상한 행동’을 한 자들을 가려낼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충성 맹세’를 하고 한동안 몸을 낮출 것입니다.”
◎ Q3.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북한체제는 어떻게 될까요. 일각에선 ‘상징 수령제’를 거론하던데요. | “김 위원장이 ‘병상 통치’를 하는 동안에는 가족과 비서 등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보좌하는 ‘문고리 권력’이 득세할 것입니다. 그러다 김 위원장이 유언을 통해 후계자를 지명할 수도 있고 그냥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종국에는 개인적 자질, 권력 기반, 정책능력이 있는 인물 또는 집단이 권력을 차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관심을 끄는 것은 3대 세습이 가능할지 여부입니다. 일부에서는 세 아들 중 한 명이 일본 천황처럼 상징적 권력을 갖고 당·정·군의 실력자들이 실질적 권력을 나눠 갖는 ‘상징 수령제’의 등장 가능성을 점치기도 합니다.”
◎ Q4. 북한의 급변사태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 “북한의 급변사태란 김 위원장의 사망이나 군부 쿠데타 같은 내파(內破), 외국과의 전쟁 같은 외파(外破)로 북한에 큰 변화가 오는 상황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도 국제정치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등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통일 논의를 둘러싼 갈등이 예상되고 국가 경제도 크게 출렁일 것입니다. 북한의 미래를 놓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과 치열한 외교전도 벌여야 합니다.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에 큰 재앙이 올 수도 있습니다.”
◎ Q5. 북한 급변사태와 관련해 한국 정부는 대응방안을 마련했나요. | “크게 군사적 계획과 행정적 계획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북한이 붕괴됐을 때 핵 관련 시설을 접수하고 반군을 제압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작전계획 5029’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독자적으로 북한 지역을 접수하고 행정력을 펼치기 위해 통일부 통일대비 계획과 충무계획 등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이 내용을 지금 현실에 맞게 개정하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Q6. 일부에선 북한 붕괴론도 거론하는데요. 그 배경은 뭔가요. | “학자들은 급변사태 등으로 북한의 최고지도자나 정권이 바뀌는 수준을 넘어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 또는 국가가 소멸되는 단계를 붕괴라고 봅니다. 최근의 북한 붕괴론은 김 위원장이 의식을 잃거나 사망할 경우 그가 구축한 1인 독재체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나옵니다. 위에서 말한 강력한 정치적 통제시스템과 ‘수령경제’라는 독특한 특권 경제를 움직일 대체 인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북한이 60년간 사회주의와 독재체제를 운영한 결과,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될 자생력을 잃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내부의 누군가가 권력을 잡은 뒤 실패한 낡은 체제를 해체하고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개혁개방을 주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Q7. 북한 리스크에 올바르게 대처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 “먼저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알아야겠지요. 북한을 여행하는 개인 리스크에서부터 북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할 때 한국에 주어지는 리스크, 종국적으로 북한이 사라졌을 때의 리스크 등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북한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북한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한반도의 같은 민족인 우리는 북한 리스크를 모르는 척하고 회피할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리스크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고 리스크가 현실이 됐을 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대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 사회, 언론 등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신석호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