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 시절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형이나 선배라는 호칭 대신, 오빠를 오빠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학력고사의 끝 혹은 수학능력시험 1세대인 ‘오빠’는 지난한 입시경쟁을 치른 뒤 ‘우리들의 천국’ ‘내일은 사랑’ 같은 대학생활을 고대하며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 시절, 1990년대 초중반의 대학풍경은 ‘달랐습니다’. 80년대에 비해 비장미는 훨씬 사그라졌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취업을 위한 학점 따기에 목매던 시기도 아니었습니다. 오빠는 기억조차 못하는 ‘광주’에 대해 선배들을 따라 죄의식을 학습했지만 어색했고, 사발식은 어쩐지 불편했습니다.
서태지와 비슷한 연배였던 오빠는 그에 대해 “자긍심과 열패감을 동시에 가진 세대” 입니다. 이념만큼이나 스타일도 중요했습니다. 오빠는 죠다쉬 청바지 대신 게스와 캘빈클라인을 입었고, 물들인 머리에 귀고리를 했습니다. 록카페를 드나들었고, 재즈음악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 시절 어른들은 오빠를 좋은 시대에 태어나 고생 모르고 자란 ‘양아치’ 혹은 ‘날나리’라며 혀를 찼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세대라 하여 ‘X세대’라고도 불렀습니다.
하지만 오빠의 20대가 기성세대의 생각처럼 풍족에 겨워 고민 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의도적으로 담을 쌓기도 했지만, PC통신으로 다른 관계를 맺고 다른 이야기를 갈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빠는 집단 대신 개인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또렷했습니다.
한편 오빠는 멋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야 라디오를 통해 들국화와 유재하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고, 하루키와 기형도를 읽었으며 타르코프스키와 레오 카락스, 왕자웨이(王家衛)의 영화를 봤습니다. 세계화시대 해외여행과 어학연수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미래에 대해 막연한 낙관을 품었지만 외환위기로 세상 살기가 녹록지 않음을 깨달은 것도 오빠의 20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우린 좀 달라.”
어느 날 오빠가 그렇게 읊조렸을 때, 저는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확실히 오빠는 그 전 세대의 ‘386 아저씨’들과는 달랐으니까요. 화염병 대신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서성거렸다고나 할까요.
여전히 오빠는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무리로 모여 한목소리를 냈던 386 아저씨들과 다른 모습입니다. 한쪽 귀에 귀고리는 사라져 흔적으로만 남았지만, 와이셔츠 안에 ‘런닝구’를 안 입을 정도의 스타일은 유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서태지와 유희열, 김동률, 이적 등 90년대 가수들의 선전(善戰)이 화제가 되고 있는 요즘, 그들과 비슷한 또래였던 오빠를 떠올립니다. 오빠도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금세 사라졌던 ‘삐삐’의 추억처럼 어렴풋이,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였던 1990년대가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어느덧 서른을 넘어 불혹을 향하고 있는 오빠, 잘 지내시나요?
그 시절, 1990년대 초중반의 대학풍경은 ‘달랐습니다’. 80년대에 비해 비장미는 훨씬 사그라졌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취업을 위한 학점 따기에 목매던 시기도 아니었습니다. 오빠는 기억조차 못하는 ‘광주’에 대해 선배들을 따라 죄의식을 학습했지만 어색했고, 사발식은 어쩐지 불편했습니다.
서태지와 비슷한 연배였던 오빠는 그에 대해 “자긍심과 열패감을 동시에 가진 세대” 입니다. 이념만큼이나 스타일도 중요했습니다. 오빠는 죠다쉬 청바지 대신 게스와 캘빈클라인을 입었고, 물들인 머리에 귀고리를 했습니다. 록카페를 드나들었고, 재즈음악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 시절 어른들은 오빠를 좋은 시대에 태어나 고생 모르고 자란 ‘양아치’ 혹은 ‘날나리’라며 혀를 찼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세대라 하여 ‘X세대’라고도 불렀습니다.
하지만 오빠의 20대가 기성세대의 생각처럼 풍족에 겨워 고민 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의도적으로 담을 쌓기도 했지만, PC통신으로 다른 관계를 맺고 다른 이야기를 갈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빠는 집단 대신 개인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또렷했습니다.
한편 오빠는 멋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야 라디오를 통해 들국화와 유재하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고, 하루키와 기형도를 읽었으며 타르코프스키와 레오 카락스, 왕자웨이(王家衛)의 영화를 봤습니다. 세계화시대 해외여행과 어학연수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미래에 대해 막연한 낙관을 품었지만 외환위기로 세상 살기가 녹록지 않음을 깨달은 것도 오빠의 20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우린 좀 달라.”
어느 날 오빠가 그렇게 읊조렸을 때, 저는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확실히 오빠는 그 전 세대의 ‘386 아저씨’들과는 달랐으니까요. 화염병 대신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서성거렸다고나 할까요.
드라마 ‘내일은 사랑’(1992~1993), 서태지와 아이들(1992~1996), 왕자웨이 ‘중경삼림’(1995)(왼쪽부터)
서태지와 유희열, 김동률, 이적 등 90년대 가수들의 선전(善戰)이 화제가 되고 있는 요즘, 그들과 비슷한 또래였던 오빠를 떠올립니다. 오빠도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금세 사라졌던 ‘삐삐’의 추억처럼 어렴풋이,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였던 1990년대가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어느덧 서른을 넘어 불혹을 향하고 있는 오빠, 잘 지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