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과 자연법의 관계는 논술의 중요 주제다.
“크레온 : 감히 그 법을 어겼단 말이냐?
안티고네 : 네. 그 포고를 나에게 내린 이는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下界)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또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불문율보다 강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서강대 2006년 수시1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안티고네를 사랑하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도 다시 들판에 버려진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화장, 봉분을 세워준 뒤 연인을 따라 자결하고, 상심한 왕비 에우리디케마저 자살하고 만다. 왕의 말이 곧 국법(실정법)이던 시절의 비극인 ‘안티고네’(소포클레스 B.C. 496~B.C. 406)를 어떻게 독해할 수 있을까. 자연법(천륜)마저 통제하려던 크레온이 결국 벌을 받은 것일까. ‘인간은 정치적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공익을 중요시한 그리스 시민의 도시국가(폴리스)에서 안티고네는 많은 이들에게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사회 안전이나 공공이익을 해쳤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국가권력(실정법)과 자연법(양심)의 투쟁을 다룬 고전으로, 소포클레스는 왕의 법(실정법)을 따르자는 순종적이고 나약한 이스메네(안티고네의 여동생)의 손이 아니라 안티고네의 손을 들어줬다는 게 중론이다. 인간이 배우지 않고도 ‘자연적으로(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는 신의 목소리와 국가나 사회가 정한 법과 규범 사이에서 한 인간이 갈등을 느낄 때 결국 (안티고네처럼) 자신의 인간다운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게 소포클레스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프랑스 시민이기 전에 인류사회의 한 구성원이기를 바란 몽테스키외나 국가를 ‘가장 조직적인 부도덕성’으로 본 니체를 기억할 것이다. 카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 마르크스와 더불어 국가주의 철학자로 신랄하게 비판한 헤겔 또한 국가권력(법)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양심영토’를 국가가 강제로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레온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희곡 ‘안티고네 모델’을 통해 국가 파시즘에 대항하는 개인의 양심이 얼마나 숭고한지 보여주기도 했다. 이와 달리 정치를 윤리의 영토에서 독립시킨 마키아벨리나 국가를 절대시한 홉스, 공동선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스메네의 손을 들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 : 지금 내가 이곳을 탈출해 도망치려 했을 때 국법이나 국가가 ‘소크라테스, 말해보게. 자네는 무슨 짓을 하려는가? 자네가 하려는 일은 우리 법률과 나라 전체를 자네 마음대로 파멸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자네는 한 나라에서 일단 내려진 판결이 아무 효력도 거두지 못하고 한 개인의 임의대로 무효가 되고 파괴될 경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면 크리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그거야 나라가 내게 부당한 행위를 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오’라고 말일세. 이렇게 대답해야 하는가?
크리톤 : 마땅히 그렇게 말해야 할 걸세, 소크라테스.” -플라톤 ‘크리톤’, 연세대 2001년 정시
과거 군부독재 시대에 일어난 의문사의 진실을 파헤쳤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왼쪽).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다비드의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
“실정법과 자연법 중 어느 것이 더 앞서는가”라는 이 유구한 물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인권변호사 박원순은 ‘악법은 법이 아니다’, 영남대 법대 박홍규 교수는 ‘법은 무죄인가’라는 저서를 각각 내 안티고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한정숙 교수는 ‘우리 안의 크레온’들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자연법(양심)을 케케묵은 반공주의로 재단한다는 비판을 한 적도 있다. 바로 유신 시절 빨치산·남파간첩 출신자들의 사망을 ‘국가폭력에 의한 의문사’로 인정한 의문사위가 ‘간첩을 영웅화’했다고 사회 일각에서 반발한 일에 대해서다.
의문사위가 해당자들의 ‘간첩’ ‘빨치산’ 활동에 대해 공로를 인정한 게 아니라, 실정법(보안법)을 위반해 수감됐을 때 사상 전향을 강요받고 고문을 받은 것은 국가폭력에 의한 인간(시민)의 기본권이 짓밟힌 ‘의문사’라는 게 한 교수의 생각이다. 광복 이후 독재정권 시절 벌어진 각종 의혹사건에 대한 재정리는 억울하게 죽은 ‘우리 안의 안티고네’를 찾아내, 그들에게 인간의 기본권을 되돌려주는 ‘우리 안의 양심 되찾기’라는 것이다. 1975년 간첩단으로 조작돼 희생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사형수들에 대한 얼마 전 무죄선고가 좋은 예다.
“논의의 초점은 ‘간첩을 민주인사로 만들었네 아니네’가 아니라, ‘비동조자에 대한 국가권력의 행사는 어디까지 미치는가, 시민의 권리는 어디서 끝나고 인간의 권리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하는 기본적 문제에 놓여야 한다. 무방비 상태의 인간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가한 국가권력의 야만성은 문제삼지 않고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인간적 권리를 무시하려 든다면, 적국 포로에 대한 인격적 대우 같은 것은 어떻게 논의할 수 있겠는가.”-한정숙 교수 칼럼에서
물론 국가를 사회 구성원간의 계약으로 보는 사회계약론자 처지에서 법은 ‘상호동의’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한 국가제도이기 때문에 정의롭다. 또한 불복종이 늘 의무일 수 없다. 만약 국가와 법에 대한 불복종과 저항이 항상 정의롭다면 최초의 사회계약론자인 홉스가 걱정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가 오고, 개인의 권리는 무참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역설의 혼란이 오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악법도 법’이라고만 외치는 ‘법실증주의 만능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사는(양심적인)’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와 안티고네처럼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을까.
“모든 법에서 그 일반적 목적은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모두 제거할 필요가 있다. 곧 해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제러미 벤담 ‘도덕과 입법원리 입문’, 고려대 2007년 수시1
법실증주의는 ‘전체의 논리’(실정법)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늘릴 수 있다는 공리주의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고, 국가를 위해서는 개인의 양심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들에게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나 안티고네의 비극은 하등 가치가 없는, 국가 안보와 사회 안전, 공공이익을 해치는 반골들의 어처구니없는 일탈행위일 뿐이다. 저 기원전 안티고네의 비극이 아직도 무서운 현실인 것이다.
- 추천 도서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소포클레스,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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