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중 한 장면.
디지털 작품
0과 1로 글자만 쓰는 게 아니다. 0과 1의 숫자로 우리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핀젤에 물감을 묻혀 화판에 바름으로써 그림을 그렸다면, 오늘날 미디어 예술가들은 키보드와 마우스를 가지고 모니터 위에 그림을 그린다. 그뿐인가? 조형예술에 회화만 있는 게 아니다. 0과 1의 숫자로 조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조각 작품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에 존재할 것이다.
미국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작업을 하는 마이클 제임스라는 작가가 있다. 그가 하는 일은 컴퓨터 속의 가상공간에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책상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컴퓨터 본체는 뚜껑이 열려 있다. 언제라도 램이나 보드, 그래픽 카드나 하드디스크드라이브를 갈아 끼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작업실은 현실의 책상이 아니라 컴퓨터 속에 들어 있다.
컬러 모니터 위에 그가 만든 작품이 떠 있다. 그가 만들어낸 것은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한 마리의 파충류다. 조각을 감상하려면 작품 주위를 돌아야 하는 것처럼, 마우스를 움직여 각도를 바꿀 때마다 그가 만든 가상의 구조물은 360도 돌아가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역시 엄연한 입체의 구조물인 셈이다. 이 모든 것을 그는 끌이나 망치 없이, 오로지 키보드와 마우스만 가지고 만들어냈다.
디지털 조각
한 마리의 카멜레온의 그림을 스캔한다. 이를 디지털로 처리하여 벡터 값으로 표현한다. 코에서 꼬리까지 카멜레온의 옆모습을 일련의 직선들로 표현한 2차원의 윤곽이 얻어진다. 마우스로 다시 측면 그림을 복사한다. 이 두 번째 윤곽의 벡터 값들의 연결점들을 드래그(끌기) 하여, 카멜레온의 또 다른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이를 앞의 것에 더하고, 거기에 또 다른 측면 그림을 더해나가면 3차원의 형상이 얻어진다(그림1, 2, 3, 4).
그 형상은 수백 개의 다각형으로 이루어진다. 이제 거기에 가상의 피부를 만들어 붙이도록 컴퓨터에 명령을 내리고, 그 매끈한 피부에 텍스처 매핑(texture mapping·오브젝트의 표면 위에 그림이나 사진 등의 이미지화된 자료를 도배지를 벽에 바르듯 입히는 방법)을 통해 까칠까칠한 질감을 부여한다. 모니터 위에 나타난 형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제임스는 카멜레온의 그래픽을 텍스트 모습으로 전환하여 보여준다(표1). 저 그림은 원래 문자와 숫자가 조합된 텍스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직은 가상이다. 제임스가 다시 일련의 명령어를 입력하니 모니터에 수만 개의 0과 1이 뜬다(표2). 이게 저 카멜레온의 본질이다. “나의 조각품은 0과 1로 된 독특한 구조물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디지털 정보일 뿐이다. 변경하려면 단지 컴퓨터에 비트의 시퀀스를 다시 연산하라고 명령만 내리면 된다.” 그의 재료는 진흙도 대리석도 강철도 아니다. 그는 세계를 0과 1로 조각한다.
디지털 진화론
‘싱킹 머신’이라는 회사의 전속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카를 심즈의 실험도 재미있다. 그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안의 일환으로 인공식물을 만들어낼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생명체가 DNA를 선택하는 과정을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만들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인공의 유기체가 스스로 여러 가지 종을 만들며 진화를 해나갔는데, 그중에는 사실적으로 보이는 종 외에 전에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종들도 있었다.
최근에 심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능적 행동을 하는 동물을 생성해내는 데까지 발생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시뮬레이션 풀장에 한 창조물의 300가지 돌연변이를 발생시킨 뒤, 이중 가장 헤엄을 잘 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잇게 프로그래밍했다. 몇 세대가 안 되어 이들은 꼬리를 흔들며 헤엄을 치는 정교한 생명체로 진화했는데, 이 경쟁의 최종 승자는 여러 개의 마디 모양으로 이루어진 물뱀이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물뱀을 물에서 꺼내 땅 위에 놓았다. 그러자 몇 세대 후에 물뱀은 네 다리가 달린 도마뱀, 기어다니는 배추벌레, 때로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토끼 모양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물 중의 일부는 전혀 예측 불가능하게도 장대처럼 제 몸을 하늘 높이 세웠다가 길게 넘어지는 식으로 전진을 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가상공간에서도 세계는 진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디지털 모자이크
스티븐 홀츠먼의 ‘디지털 모자이크’는 그보다 앞서 나와 디지털 미학의 고전이 된 ‘디지털 만트라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는 궁극적으로 추상적 구조의 조작자’라는 메시지를 담은 전편에 이어, 여기서도 그는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갖는 새로운 표현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사진과 영화라는 매체가 한때 기존의 회화를 위협하면서 새로운 미학을 낳은 것처럼, 디지털 매체 역시 새로운 형태의 미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카를 심즈의 작품 물뱀.
가령 최고의 판매고를 자랑한 CD롬 ‘미스트’ 속의 도시는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멀리 있는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공기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아,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똑같이 또렷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기가 너무 청명하여 원근이 사라진 듯한 이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외려 ‘미스트’ 특유의 이국적 분위기로 받아들인다. 한마디로 디지털의 ‘한계’를 디지털 표현의 ‘가능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디지털 맥루언
홀츠먼이 디지털 표현의 미적 특성으로 드는 것은 ‘픽셀(pixel·주소화될 수 있는 화면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우리가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보는 화상은 픽셀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크게 확대를 하면 이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형상이 실은 서로 단절된 점들의 집합으로 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아날로그 세계가 연속된 흐름이라면, 디지털 가상의 세계는 단절된 점들의 조합이다. 아날로그의 연속성에 대비되는 디지털의 단절성. 홀츠먼은 바로 거기에 디지털 표현의 미적 본질이 있다고 본다.
이는 물론 맥루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디지털 모자이크’라는 제목 자체가 이미 마셜 맥루언을 기리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은 서로 단절된 미세한 망점들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마음속으로 연결해 국자의 모양을 상상하듯이, 시청자는 단절되어 있는 망점들을 연결해 연속된 이미지로 수용한다. 이 때문에 완성된 그림인 영화의 영상과 달리, 텔레비전 영상은 미완성된 채로 전달되어 수용자가 완성해야 할 일종의 모자이크라는 것이다.
사실 맥루언이 살던 당시의 텔레비전은 해상도가 높지 않았기에 텔레비전 영상이 모자이크라는 생각을 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디지털 방송이나 HD 텔레비전은 영화의 영상을 뺨치는 고도의 선명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기술의 발전으로 텔레비전의 해상도가 영화 못지않게 높아지면 어떻게 될까? 맥루언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텔레비전이 아닐 것이다.”
키보드 조작만으로 인공적 유전인자의 결합체를 결정하는 패러미터들을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나무나 다른 식물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미 고해상의 텔레비전을 갖고 있듯이, 언젠가 기술의 발달로 디지털 가상이 아날로그 세계와 거의 똑같은 영상을 구현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때도 용량의 부족에서 비롯된 결핍성이 여전히 디지털의 미학적 특성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홀츠먼 역시 맥루언처럼 이렇게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디지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보는 듯하다. 컴퓨터와 메모리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아날로그 세계의 풍부함을 따라가기에는 늘 용량이 부족하리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때쯤이면 컴퓨터는 더 이상 ‘디지털’이 아닐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언젠가 아날로그 세계를 보이는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컴퓨터는 홀츠먼이 제시하듯 이미 아날로그 컴퓨터, 혹은 디지털에 아날로그를 접합한 새로운 세대의 매체로 진화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늘날 해상도가 높은 텔레비전은 “더 이상 텔레비전이 아닐 것”이라는 맥루언의 말을 들으며 폭소를 터뜨리듯이 실물을 방불케 하는 수억, 수천만 화소로 이루어진 동영상이 끊김 없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모자이크야말로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한 홀츠먼의 말을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빌렘 플루서에 따르면, 아날로그 세계의 연속성과 이진법 숫자의 단절성의 모순은 이미 미적분학의 발명과 더불어 해결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