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노조 집행부가 3월24일 서울 여의도 KBS 노조사무실에서 노조 중앙위원회 회의에 대한 사 측의 도청 증거물을 제시하고 있다.
3월25일 KBS노동조합(위원장 진종철) 집행부는 ‘이달 29일까지 정연주 사장 자진 퇴진’을 전격 제기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직능별 모임들을 중심으로 “노조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건을 무리하게 확대하고 있다”는 내부 비판이 강하게 터져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3월23일. 당시 노조는 KBS 신관 5층 국제회의실에서 팀제 보완 인사에 대한 노조의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노무팀 직원이 회의 내용을 불법 녹취하다 적발된 것이다.
녹취가 이루어진 장소는 회의실에 부속된 방송실이었다. 그곳에선 노조 측의 요청으로 엔지니어 한 명이 회의 내용을 녹음하고 있었다. 이때 곁에 앉아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토론 내용을 메모하고 있던 노무팀 직원이 “자리를 뜰 경우 중요 사항을 놓칠 수 있으니 따로 녹음을 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 노조 측은 사건 다음날인 24일 언론에, 회의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 2개와 ‘오늘 녹음은 처음 있는 일로 의욕이 앞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노무팀 직원의 확인서를 공개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회사 측은 “조합에 정중히 사과한다”며 그러나 “경위조사 결과 결단코 회사 간부나 해당 팀 차원의 조직적 행위가 아닌 (개인의) 업무 의욕 과잉으로 빚어진 우발적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해명을 했다. 안동수 부사장이 진종철 노조위원장을 찾아가 이 같은 뜻을 전하는 한편, 25일에는 대국민 사과문도 발표했다. 또한 노무팀 해체와 경영진 3개월 감봉 처분을 약속했다.
그러나 노조 집행부의 태도는 단호하다. 노조 관계자는 “설사 정연주 사장 모르게 이루어진 일이라 해도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이 하야한 것이 꼭 본인이 도청 사건을 주도했기 때문이냐”고 반문했다.
사내외에서 ‘반(反)정연주’ 노선을 분명히 해온 현 노조 집행부는 1월6일 출범 이래 정 사장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왔다. 3월에만도 사 측 의견에 정면 반박하는 성명을 수차례 발표했다. 노조 측은 “정 사장 자신이 늘 도덕성을 강조해온 만큼 이번 사태에 대해 꼭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노조의 대응 방식이 고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점. KBS 내에는 무려 19개에 이르는 직능별 협회가 있다. 그중 KBS프로듀서협회가 25일 가장 먼저 노조 방침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프로듀서협회는 ‘노조집행부의 성급한 대응에 우려를 표명하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노사협의회 등 노사 간 공식적 통로를 통해 해결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노력 없이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사회적 문제로 확산시킨 성급한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조합원에 대한 충분한 의견 수렴 절차도 생략한 채, 사장 퇴진을 전면 요구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대응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강현 프로듀서협회장은 “현재 노조원들의 정서와 견해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을 노조 집행부는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KBS기자협회 또한 ‘노사의 극단적 대립을 경계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이번 사태를 극단적 투쟁으로 몰아가려는 (노조 집행부의) 태도에 동의하기 힘들다”는 뜻을 밝혔다. 아나운서협회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나운서협회는 성명서에서 “사안에 대한 (노조 집행부의) 신속한 대응은 좋았으나, 과연 그 결정에 얼마나 많은 노조원의 뜻이 담겨 있는지 재고해볼 문제”라고 밝혔다. “중앙위원들의 의견 수렴 없이 기자회견을 연 것이나 구체적 일자를 명시한 사장 퇴진 성명에 대해 많은 회원들이 의구심과 우려감을 표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노조의 대응 방식을 지지하는 직원들도 있다. 행정직원들로 구성된 KBS경영협회 관계자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KBS기술협회 또한 속시원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정연주 사장에 대한 사회적 지탄과 책임 추궁으로 결말이 날 듯했던 불법 녹취 건은 바야흐로 조직 내 잠복해 있던 해묵은 갈등과 반목을 전면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지게 됐다. KBS로서는 설상가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