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 부용면 온천 개발 현장. 평화롭던 산골마을이 굴삭기로 파헤쳐지고 있다.
체온보다 낮은 이 정도 온도의 물에 몸을 담글 경우 정상적인 느낌은 ‘차갑다’여야 한다. 그런데 물이 뜨거웠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J유황온천측이 지금까지 이 물을 끓여 공급해온 것이다. J유황온천의 김모 상무는 이에 대해 “사람들은 온천이 뜨거운 줄 안다. 하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물이 미지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끓이는 것”이라고 시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유황온천은 ‘온천’이다. 차가운 온천. 이 비논리적인 상황 뒤에는 우리나라 온천법의 허점이 숨어 있다. 온천법 제2조에 따르면 온천은 ‘지하에서 용출하는 25℃ 이상의 온수로 그 성분이 인체에 해롭지 아니한 것’이다. 펄펄 끓는 온도로 땅 밑에서 솟아오르거나, 건강에 유익한 성분을 함유하지 않은 물이더라도 충분히 ‘온천’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단순 지하수들이 ‘온천’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행정수도 물망에 오른 충북 오송 지역에서 차로 15분 거리인 청원군 부용면에서는 지금 온천 개발을 위한 굴착공사가 한창이다. 겨우 10여 가구가 모여 살던 조용한 시골마을에 공사가 시작된 것은 10월 중순. 고속철이 2004년 봄 개통되면 편리해진 교통 때문에 개발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이자 땅값 싼 이곳에 온천을 개발해 한몫 잡으려는 온천업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온천이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한 개발업자는 “이 근처는 부강약수가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온천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관광수입을 크게 올릴 수 있다”며 “1000m 깊이까지 뚫을 예정이니 충분히 온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어느 곳이든 500m만 파면 온천?
그가 이처럼 확신하는 이유는 한국자원연구소의 조사결과 우리나라는 땅속으로 100m를 파 들어갈 때마다 온도가 2.5℃씩 오르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지표수의 평균온도는 12.1℃. 어느 곳에서든 500m만 파 들어가면 ‘온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때문에 2002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업 중이거나 개발되고 있는 온천은 모두 277개, 온천을 발견하기 위해 뚫어놓은 온천공의 수가 945개에 이른다. 4758만6000평에 이르는 국토가 ‘온천 지역’일 정도다. 부용면 일대 역시 대규모 위락시설 건설을 위해 굴삭기가 끊임없이 산들을 파헤치고 있었다.
지하 665m를 파 들어가 26℃의 온천을 얻은 양평 Y온천이나 770m를 파서 27℃의 ‘온천’을 발견한 이천 S온천 등을 과연 ‘온천’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사실상의 ‘지하수 목욕탕’을 ‘온천’으로 포장한 곳은 전국에 셀 수 없이 많다.
충북 충주시 N탄산온천 인근 하천. 뜨거운 온천 폐수가 무단 방류되면서(아래) 하천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다.
심도를 살펴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굴착 깊이가 100m 이내인 곳은 전체의 1.3%뿐. 전체 온천의 60%인 557곳이 500m 넘게 땅을 파내 온천을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하 1km 이상 파 들어간 경우도 12곳에 달한다.
이 때문에 전문가와 환경운동단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온천이 나라를 다 망친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온천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손광운 변호사는 “현재 우리나라의 온천 수는 전국의 시·군당 1개 이상씩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난개발이 계속될 경우 수년 안에 면 단위당 1개 이상의 온천지구가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무분별한 온천 개발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도 문제다. 12월18일 오전 9시30분, 충북 충주시 N탄산온천 주변 하천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N온천에서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파이프가 쉴새없이 뜨거운 폐수를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근 N교 아래 하천은 이미 심각하게 오염돼 있는 상태. 동물의 사체까지 쌓여 있는 강 바닥을 나뭇가지로 헤치자 오염 부유물질들이 떠올랐다. 하천이 뻗어나가는 인근의 논과 들판에서도 연신 더운 김이 피어올랐다.
이에 대해 충주 환경운동연합 임계순 사무국장은 “이 하천은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물줄기”라면서 “장마철에 물이 넘치면 이 오염물질들이 다 어디로 가겠느냐”며 혀를 찼다. 이 지역에는 N온천 외에도 D온천, C온천 등 수온 30℃ 이하의 온천 4곳이 수백m 간격으로 들어서 있지만 하수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주변 하천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다.
임삼진 녹색도시연구소 공동대표는 “한때 연어가 올라오던 경북 울진군 평해읍 남대천도 백암온천이 개발되면서 수질이 떨어져 2급수로 전락했다”며 “땅 깊은 곳에서 지하수를 억지로 뽑아내 펄펄 끓인 후 다시 내버리는 행태를 정비하지 않으면 국토가 모두 망가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땅을 파헤쳐 온천을 발견한 후 상업성 여부를 측정하는 현실도 국토 난개발을 부추기고 있다. N온천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충주시 연수동에는 가건물로 지어진 C온천개발조합사무실이 흉물스레 버려져 있었다. 이 지역에서 온천 개발을 위한 굴착공사가 시작됐지만 사업성 문제로 계획이 미뤄지면서 사무실이 폐쇄된 것이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창문에는 3개월 이상 요금 미납으로 단전한다는 공문이 붙어 있었다. 이 건물이 버려지듯, 인근 자연 역시 훼손돼 버려졌다. 이곳만이 아니다. 경북 상주시와 충북 괴산군 사이의 접경 지역인 속리산 국립공원 일대는 문장대 용화온천의 개발 중단으로 48만평이 훼손된 채 방치돼 있고, 충남 천안시 목천면 천안온천지구 역시 22만평의 삼림만 파괴한 후 공사가 중단돼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현행 온천법은 ‘시장·군수는… 온천이용시설의 설치에 소요되는 비용에 대하여 그 일부를 보조 또는 융자 알선하는 등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돼 있어 개발비가 없는 사람까지도 온천을 개발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관광자원 개발이 절실한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온천 개발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이 같은 난개발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발 위주로 규정되어 있는 온천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주된 내용은 지하증온율 개념을 도입해 굴착 심도에 따라 온도 기준을 상향 조정하고, 수질 기준을 보강해 인체에 유익한 성분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을 함유한 것만 온천으로 지정하자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온천은 ‘지하에서 용출하는 온수, 광천수, 수증기 기타 가스로서 … 총 19개 성분(인체에 해롭지 않고 심미적으로 기분이 상쾌해지는 성분) 가운데 한 가지 이상의 성분을 함유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무 성분이 포함돼 있지 않은 단순천이 전체 온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부산대 지질학과 함세영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과거부터 잘 알려진 수온 40℃ 이상의 유성, 덕산, 온양, 척산, 부곡 온천 등이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온천 개발과 지하환경 파괴로 이들 온천마저 최근에는 수량 감소 등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진정한 ‘온천’을 지키고 무분별한 개발을 막기 위해 온천을 공적 자원화하고 일본의 온천중앙연구소, 프랑스 이탈리아의 온천의학연구소와 같은 전문기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